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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격감성허세남 Dec 30. 2022

낯선 모습


한 해의 마지막 출근 날엔 가능하면 회사에 가지 않고 휴가를 쓴다. 그렇다고 특별히 뭔가를 하는 건 아니지만 한 해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다. 출근 대신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 문득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태연하게 아이를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가는 내 모습은 예전엔 전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상상하던 어른의 모습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마치고(프리젠테이션은 기본이지), 도시의 불빛이 보이는 바에서 술을 한 잔 하고, 휴가엔 세계 여행을 다니고, 아침엔 운동을 하고, 맛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우아하게 밥을 먹고. 하지만 그 모습 속엔 언제나 나 혼자였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상상 속 멋진 어른은 언제나 혼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아내와 아이들이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함께 한다. 아침엔 운동 대신 힘겹게 일어나고,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애들을 재우고 나면 피곤해서 쓰러지거나 가끔 캔맥주 한 캔 하는 게 고작이고, 오늘처럼 휴가를 내고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상상도 못 했던 그런 일상인데 그게 또 싫지는 않다. 상상과 다르다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단지 아예 몰랐던 그런 모습일 뿐이니까. 인생은 내 순진한 생각처럼 흘러가진 않더라. 늘 내 예상과 다른 일들이 펼쳐지고, 오히려 나는 그걸 헤쳐나가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내년이면 첫째가 10살, 나는 40살. 이런 나이가 내게 오리라 생각도 못 했는데. 2022년에는 이직도 했다. 내가 여기를 다닐 줄은 역시나 생각도 못 했지. 나이가 드니 좋은 건 늘 발생하는 새로운 일에 조금은 무덤덤해진다는 점이다. 어차피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아니까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고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게 성숙이라면 성숙이고, 불혹이라면 불혹인 것 같다.


<서른 즈음에> 노래 가사에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부분이 나온다. 나이 서른에 어떻게 저런 걸 알게 된 거지?  정말 맞는 말이다. 살다 보면 늘 무언가와 이별을 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내 몸도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 않은가. 이제는 언젠가 부모님과 이별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걸 보면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이런 모습조차 낯설다.


그래도 2023년도 또 잘 살아가겠지. 낯선 나와 함께. 무슨 일이 펼쳐지든 2022년보다 덜 흔들리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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