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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Jan 01. 2021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아프리카 종단기 11. 남아공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 남아공에서 맞닥뜨린 끝없는 눈요깃거리

모로코에서 남아공까지 100일:
세계일주 200일 차에 모로코를 통해 도착한 아프리카 대륙.
300일 차에 남아공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딱 100일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스텔렌보스, 남아공


“여행하면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


어김없이 받는 이 질문에는, 한참 고심하다가도 결국 모로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거기엔 꼭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도 나중에 가장 살고 싶은 곳은 남아공이라고.


평생 미련 없을 줄 알았던 한국이 가장 그리웠던 건 미국에서 살 때였다. 외국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리함과 안정감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즐거운 거랑은 별개로, 확실히 한국의 익숙함은 따라올 수가 없다. 그래서 매번 ‘역시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라고 깨닫곤 한다.


하지만 남아공은 예외였다. 야생 동물, 바다, 산, 액티비티, 음식… 아프리카 종단을 하며 봐왔던 모든 하이라이트는 사실 남아공 한 나라에서 다 찾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이 색달랐고, 하루도 기분이 나쁠 일이 없었다. 물론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시작된 고생을 다 겪은 이후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남아공은 이전까지 방문했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발전된 인프라 덕에 편리했고 수월해서, 과연 아프리카의 작은 유럽이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이곳이라면 나중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꿈이 하나 생겼다. 나중에는 정착된 집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여행객이 아니라 거주자가 되어 한 도시 한 도시마다 오래 체류하다 떠나고 싶다고.

내가 남아공에 간 가장 큰 이유는 사실 펭귄을 보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도시 바깥으로는 나도 절대 안 가. 저번에 친구들과 차를 타고 오는데도 흑인들과 시비가 붙어서 큰일 날 뻔했거든."


남아공의 카우치서핑 호스트 아만다는 케이프타운 옆에 위치한 소도시 스텔렌보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각종 와이너리 덕분에 포도나무가 즐비해 있는 이곳은 소소하고 평화로운, 교환학생을 오고 싶을 만한 동네였다.


아만다는 나에게 Beyerskloof 와이너리를 추천해 주며 여기 학생들이 종종 싼 가격에 테이스팅을 하러 가서 실컷 마시고 취해 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나는 오프닝 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춰 제일 먼저 입장해서 대낮부터 얼굴이 벌게져 나왔다. 

와이너리에 끝없이 펼쳐진 포도나무들



케이프타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는 빅토리아 폭포에서 만난 한국인 민호 아저씨와 지환이와 함께 렌터카로 로드트립을 하느라 카우치서핑은 하지 않았다. 로드트립의 첫 목적지는 볼더스 비치에 지우갯가루마냥 널려있는 펭귄들. 그 누가 펭귄이 남극에만 산다고 했던가! 대망의 남아공에 도착해서는 초록색 수풀과의 조화가 어딘가 어색한 아프리카 펭귄을 보았다. 멍청하게 서있다가 잠도 자다가 심심하면 수영도 하다가...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녀석들이다. 수영하다가 파도가 휩쓸려 오면 우르르 무너지는 게 귀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사실 남아공에 오고 싶었던 건 펭귄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로 생긴 마음이라 이것만으로도 난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펭귄들의 천국 볼더스 비치


하지만 그 밖에도 남아공은 엄청난 곳이었다. 한 번은 도로를 달리다가 지도를 보니 옆에 석호가 있길래 호수나 볼 심산으로 차를 멈추었다. 언덕을 넘어 등장한 건 뜻밖에도 끝없는 플라밍고 떼였다! 무리 지어 일제히 걸어가다가, 또 다 같이 날아가기를 반복하던 플라밍고들은 일순간 저 멀리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듯이. 자연 그 자체의 장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플라밍고는 나쿠루 호수에 많기로 유명한데, 나쿠루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것도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큰 행운이라 몇 시간 동안이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비현실적이었던 플라밍고 떼 목격


이 날은 웃기게도 여러 가지로 운이 굉장히 좋은 날이었다. 플라밍고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 웬 쌍무지개가 하늘에 떴던 걸 포함해서, 현지인들의 값싼 바비큐(Braai) 노점 행렬을 발견하기도 했고, 온종일 웃음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수월하게 일이 풀렸다.

처음으로 본 쌍무지개


한 가지 운 나쁜 일이 있었다면, 와인이 유명한 남아공인 만큼 와인 테이스팅을 해보러 간 와이너리가 도착 1분 전에 닫았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도 플라밍고를 본 게 더 큰 수확이니 위안 삼으며 와인을 산 후 인증샷만 남기고 왔다.

아쉬운 대로 와인은 숙소에서 마시는 걸로


그날 밤엔 야경을 보러 시그널힐에 올라갔다. 돌이켜 보니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야경인지라 감동이 배가 되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야경이랄 것이 없었고, 큰 도시들은 위험해서 밤엔 외출하질 못했으니. 몇 달만에 보는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LA에서 본 야경보다 더 예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야말로 운 좋은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

시그널힐의 아늑한 야경



가든 루트, 남아공


다음 날부터는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가든 루트를 따라 로드트립을 계속했다.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고된 일만 많았는데, 눈호강이 가득한 렌트 여행을 하니까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달까. 여러모로 남아공은 나에게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가든 루트의 첫 시작은 아프리카 대륙 모양이었던 이 지점


저녁에 도착한 모셀베이에서는 돌고래 떼의 행진까지 목격하기도 했다. 처음엔 물개인 줄 알고 무심코 지나가려다가 지느러미를 보고 돌고래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동물원에 갇혀 있거나 돈 내고 투어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이렇게 야생 속의 생물들을 보게 되니 더욱 심장이 뛰었다. 

이런 색깔 끝내주는 바다는 며칠 내내 질리도록 보았다


돌아가는 길에 들른 도시 오츠혼은 타조가 세계에서 가장 많기로 유명해서, 타조농장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 아침에는 야생 미어캣을 엿보러 가는 투어도 있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돼서 포기하고는 타조를 보러 왔다. 그런데 너무 늦어서 타조농장 투어도 못하게 되었다. 투어 중엔 타조알에도 올라가 보고 타조를 직접 탈 수도 있댔는데! 아쉬운 대로 농장 근처에서 사진만 찍기로.

저 까만 점들은 사실 다 타조다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와서 들른 테이블마운틴은 사실 세 번이나 올라가려고 했는데 죄다 실패했다. 첫날은 케이블카 운행을 안 해서, 둘째 날은 비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서, 세 번째는 케이블카 줄이 감당 안 될 정도로 길어서. 테이블마운틴도 그렇고, 와이너리나 타조 농장, 미어캣 투어도 그렇고, 아쉽긴 하지만 다시 한번 남아공에 갈 이유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만족. 못 해본 게 남아도 어차피 또 오게 될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으니 덜 아쉬운 듯하다. 

명물 테이블마운틴에서 태극기와 함께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다. 경치도 아름답고 물가도 싸고 액티비티도 다양하지만, 딱 한 가지 씁쓸한 점이 있다면 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나가면 예전만큼 확연하진 않더라도 백인들과 흑인들이 다른 구역에 사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 채용도 흑인을 우선시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요샌 오히려 백인들이 역차별당하는 추세라곤 하지만, 스텔렌보스 대학생들도 대부분 백인인 것을 보면 정부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 큰 변화는 없는 모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리카 종단 전체에서 가장 차별이 없으면서도 가장 차별이 심했던 나라. 모든 게 좋아 보이면서도, 복대 안 보이게 잘 가리고 다니라는 현지인의 충고에 깜짝깜짝 경각심이 들게 되던, 그런 아슬아슬한 경계의 나라 남아공.

알록달록한 케이프타운의 '보캅'


여기서 내 아프리카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나는 이 대륙을 분명 또 방문할 것이고, 여러 사람이, 문화가, 생활 방식이 공존하는 이 세계를 완벽히 받아들이기 위해 계속 노력할 테니까. 애초부터 아프리카에서 카우치서핑을 한다는 게 사실 많이 두려웠다. 정보도 많이 없었고, 환경도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자연이나 투어 상품을 제외하면 볼거리가 크게 없는 각 도시들이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해진 건 다 카우치서핑 덕이 아니었나 싶다. 그냥 보고 찍는 여행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많이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제각기 다른 인종, 종교, 생활을 다 뛰어넘어 대화한다는 건 쉽사리 얻는 기회가 아니니까.


그 당시엔 막막했던 바가지 샤워도, 구멍 뚫린 화장실도, 온갖 벌레들도 이제는 다 소중한 추억으로...!

안녕, 내가 가장 사랑했던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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