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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Jan 10. 2021

무작정 떠난 쿠바 여행 7. 와이파이 노예의 고난

세상에서 인터넷이 가장 제한적인 나라에서 살아남기

열흘 간 쿠바에서 사용한 인터넷,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3시간. 

정확한 사용 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쿠바엔 무료 와이파이나 유심 플랜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여행 중 비용도 아낄 겸 인터넷 이용 시간도 줄일 겸해서 유심을 사지 않고 와이파이에만 의존하는 방식을 고수하던 나조차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 쿠바의 역대급 시스템.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와이파이 카드를 구입해야 하고, 지정된 와이파이 스팟에 찾아가 스크래치 번호를 긁은 후 입력하면 카드에 적힌 시간만큼 인터넷을 쓸 수 있다. 지출내역을 보니 나는 1시간짜리 와이파이 카드를 총 13번 구입했었다.

1시간짜리 와이파이 카드의 가격은 1달러. 그마저도 ETECSA라는 통신사에 찾아가 구입해야 했는데, 인터넷의 노예는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언제나 입구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게다가 쿠바의 일처리는 영화 주토피아에 나오는 나무늘보가 연상될 정도로 느린 편이라서, 그 무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은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 한 번 살 때 카드를 잔뜩 사면 되지 않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1인당 일일 구입 한도는 3장이었다.


아바나의 호텔 와이파이 스팟


카드를 구입하고 나면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국가에서 지정한 와이파이 스팟에 가야만 쓸 수 있다. 물론 카드에 충전된 1시간이 바닥나면 연결도 끊긴다. 이 스팟들은 보통 호텔이나 큰 공원인데, 굳이 검색해보지 않아도 근처를 지나다 보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는 우스운 광경 덕분에 알아차리기가 쉽다. 아바나의 숙소 3분 거리에 있는 호텔이 내가 애용하는 와이파이 스팟이었는데, 여긴 해가 지고 나면 쇠창살로 입구를 닫아버려서, 그 후엔 쇠창살 사이로 휴대폰을 들이밀고 인터넷을 쓰려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곤 했다. 심지어 어떤 아줌마는 내가 소심하게 인터넷을 이용하려고 구석에 서자, 내게 손짓하며 와이파이가 잘 잡히는 쇠창살 한 켠을 내주는 친절(?)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나중에 아바나에서 만난 현지인 친구 아딜슨은 이게 몇 년 사이에 그나마 굉장히 발전한 거라고 회상했다. 처음엔 베네수엘라의 도움으로 인터넷망을 겨우겨우 끌어왔다고. 그리고 특이하게도 와이파이에 연결되지 않아도 이메일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말도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쿠바인들은 나와 연락할 때 다른 메신저 앱보다 이메일을 가장 선호하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영국 친구들과 메일을 주고받던 기억이 떠오를 만큼 아날로그적인 느낌이었다. 


트리니다드의 공원 와이파이 스팟


그러나 쿠바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나를 가장 애먹인 문제는 이 와이파이 카드의 스크래치 번호였다. 복권처럼 긁어 벗겨내면 번호가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처음 샀을 때 손톱을 더럽히기 싫은 마음에 동전으로 긁었다가 너무 세게 긁혀서 번호가 다 훼손된 적이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ETECSA에서 새 카드를 구입하면서 훼손된 카드 교환이 가능할지 물어보자, 다음 날 오면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도대체 왜 당일 교환이 안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 후 트리니다드에서 한번 더 ETECSA를 찾아 교환을 시도해 봤으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 날 오란다. 역시 이유는 알려주지 않는다. 

혹시 오후에 가서 그런가 싶어서, 아바나에 돌아간 후 아주 로컬스러운 지역에 있는 ETECSA 지점을 아침 일찍 방문했다. 오픈 시간에 맞춰 갔는데도 이미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일렬로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문 가장 가까이 있는 아줌마 뒤에 섰는데, 가만 지켜보니 쿠바는 굉장히 특이한 줄 서는 방식을 갖고 있는 듯했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지는데, 아마 “마지막으로 온 사람이 누구야?”라는 뜻인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던 사람이 손을 들면, 새로 온 사람은 본인 앞 순서가 누구인지만 기억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줄 설 필요 없이 벤치나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3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순서가 되어 입장한 후 구글 번역기로 꾸역꾸역 상황 설명을 했다. 무심해 보이는 여직원은 여권을 요구하더니 컴퓨터에 무언갈 잔뜩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유도 모른다. 대체 왜 와이파이 카드 하나를 교환하는 데 이렇게 번거로운 서류 작업이 필요한지는. 멀뚱히 15분쯤 서 있자, 웬 문서를 뽑아와서는 서명을 하란다. 기쁜 마음에 서명을 하고 이제 다 끝났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또 10분을 멀거니 기다렸다. 비냘레스로 가는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마음이 촉박해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급한 내색을 했으나 상대방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인쇄기까지 느긋하게 갔다 오는 걸음걸이가 어떻게 그렇게 느릴 수가 있는지. 

결국 마지막엔 나를 인쇄기 옆에 세워두고 다른 손님을 받았다. 뭔가가 인쇄되면 서명하라는 식인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 인쇄기가 고장이 나서 한참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엔 한국의 통신사가 그려지며 울상이 되어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침내 인쇄가 완료된 후 또다시 느긋한 걸음걸이로 직원이 다가와 서명을 확인하고 새 카드까지 교환받고 나니 1시간이 넘은 상태였다. 이 모든 건 고작 1달러짜리 와이파이 카드를 교환하겠다는 내 오기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문제의 와이파이 카드와 교환 서류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비냘레스에서 만난 외국인 여행객들이 전부 다 와이파이 카드를 너무 세게 긁어 훼손해 버렸다는 것. 나만 바보짓을 한 게 아니라 꽤 흔한 문제인가 보다. 동전이 아니라 긴 손톱으로 긁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불안해하는 그들을 위해 새 카드를 일일이 긁어 주었다. 그중 한 명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너 쿠바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와이파이 카드 안전하게 긁어주고 돈 벌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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