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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Jan 17. 2021

무작정 떠난 쿠바 여행 13. 혼자 여행, 혼자를 빼면

예상치 못한 인연이 단비같이 반가울 때

“여기 음식 맛있어?”


웬 통통한 남자가 땀범벅인 채로 내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던진 첫마디였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만남이었다.



트리니다드에 도착한 날은 비가 딱 기분 나쁠 정도로만 약간씩 내리던 찝찝한 날씨였다. 답장도 없이 잠수 탄 에어비엔비 주인 덕분에 한 시간 넘게 밖에서 기다리며 이웃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한 끝에야 방에 들어가 짐을 풀 수 있었고,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그 동네의 낯선 분위기에 채 적응하지 못한 나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하도 작은 마을이라 이렇다 할 만큼 유명한 음식점도 딱 한 군데. 길거리 음식 같은 것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음식점은 막상 가 보니 단체석이 즐비한 분위기라서, 아무리 혼밥을 거리낌 없이 하는 나라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긴 고민 끝에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또다시 기분 나쁜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도저히 미로 같은 골목길을 탐색하며 점심거리를 찾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결국 눈을 딱 감고 들어가고 말았다. 인기가 많아 거의 만석이었던 그 음식점은 다행히도 작은 2인용 테이블이 딱 하나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후딱 배만 채우고 다시 나설 생각이었다.


음식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종업원이 갑자기 다시 오더니 다른 손님과 합석해도 괜찮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에 나처럼 혼자 오는 사람이 또 있다니, 괜한 동지애를 느끼며 승낙하자 작은 중절모에 거대한 남자가 반갑게 영어를 뱉으며 앉은 것이다. 그는 폴란드에서 온 아담. 어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친근한 친구였다. 그는 내가 추천해 준 음식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더니 대뜸 웬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그가 말했다. 8월, 쿠바의 더위는 살인적이었으니. 대화도 할 겸 그와 먹는 속도를 맞추다 보니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음식점에 한참 동안 앉아있게 되었다. 따로 칵테일을 한 잔 추가로 시키자 타이밍 좋게 식당에서 전통 공연까지 시작했다. 



둘 다 트리니다드에 막 도착해서 딱 하룻밤만 머무는 일정이라 의도치 않게 동행할 친구가 생겼다. 쿠바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신기할 정도로 참을성이 없던 그는, 와이파이 카드 시스템을 정말로 불편해했다. 공식 판매처에 줄 서서 기다리는 것도 도저히 못 하겠다며 따로 돈을 더 얹어주고 길거리 상인에게서 살 정도였으니까.


“정말 더워 죽겠어. 쿠르바.”


거의 말끝마다 폴란드어 ‘쿠르바’를 붙이는 그에게 뜻을 물어봤더니 그는 껄껄 웃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쿠르바라고 답했다. 짜증 날 때, 놀라울 때, 짜릿할 때, 언제든 다 들어맞는다며. 사실은 비속어라고 하는 걸 보니 어느 나라나 그런 문화는 다 똑같은가 보다.



날이 좀 선선해지자 우리는 광장을 돌아보고 야외 공연을 하는 시내 중심가로 가서 차가운 맥주를 시켜먹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저물수록 점점 더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고, 앞에 나아가 춤을 추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중엔 어떤 젊은 여행객 부부도 있었다. 마침 와이파이가 약하게 잡히는 스팟이라 아담은 휴대폰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었는데 그가 어김없이 내뱉은 ‘쿠르바’에 그 부부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뭐야, 너 폴란드에서 왔어?”


부부의 말에 아담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두 아이를 잠시 가족에게 맡겨두고 둘이서만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쿠바로 놀러 왔다는 부부의 이름은 조아나와 바르토즈였다. 타지에서 동향인을 만나면 반가운 건 만국 공통인지, 그렇게 나는 쿠바에서 뜬금없이 폴란드인 셋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쿠르바를 외치며.


“아이를 낳고 나서의 변화라… 글쎄, 나는 사실 부모가 되려면 엄청 진중해져야 할 줄 알았는데 우린 여전히 와일드하고 또라이같이 살아.”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나만 소외감을 느낄까 봐 계속 영어로 얘기해주던 조아나.


“우린 부모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커플이니까. 때로는 단둘이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업이 춤 강사라서 열심히 내게 살사를 가르쳐준 바르토즈.


“허리케인 피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몇 주간 해보고 싶어서. 회사엔 휴가 내고 왔어.”


도미니카의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김에 쿠바까지 여행하러 온 아담.


“나는… 틈날 때마다 여행가지 않으면 나중엔 결국 미루기만 한 채 아무 데도 못 갈 것 같더라고.”


그리고 여름학기가 끝나자마자 개강 전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러 날아온 나. 그날 밤 우리는 신나게도 놀았다. 작은 마을 전체가 고요해질 정도로 늦은 시간에 유일하게 문을 연 살사 클럽에 가서 양주 인지도 맥주 인지도 모를 때까지 마셔대고는 다음 날 아침 피곤에 찌든 얼굴로 다시 만나기까지.



그래서 나는 그 날 오후 때마침 내려준 비에 감사한다. 수많은 내적 갈등 끝에 용기 내어 홀로 음식점에 들어간 나 자신을 칭찬한다. 그로 인해 트리니다드의 모든 기억이 바뀌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인연. 그로 인해 변하는 일정. 그리고 특별한 추억. 내가 혼자 여행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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