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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Jan 19. 2021

무작정 떠난 쿠바 여행 14. 베다도의 밤

기대에 차 다시 돌아온 아바나에서 마주한 일

트리니다드에서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아바나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이번에는 베다도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처음에 머물렀던 올드 아바나는 관광지가 밀집해 있고 걸어 다니기에 편했지만 이미 웬만큼 다 둘러보았으니 새로운 지역에 머물러 보고 싶었다. 베다도는 깨끗하고 맛집도 많은, 잘 사는 지역이라고 들었다. 굳이 단점이라면 주거지역이라 밤에 연 곳이 많이 없어 너무나도 어두웠던 것. 숙소를 찾아가면서 내가 사는 분당을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까사 주인 다니엘은 여느 쿠바인처럼 나를 따스하게 맞았고, 내가 첫 한국인 손님이라며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건 사실 그 가족 전체가 굉장한 한국 드라마 팬이었기 때문. 나를 보자마자 다니엘의 아내는 반색을 하면서 TV를 켜고 최근에 보고 있는 드라마를 줄줄이 보여주었다.


“제일 좋아하는 배우는 이민호야. 너무너무 잘생겼거든. 태교 할 때도 이민호 나오는 드라마만 봤어.”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민호의 얼굴을 화면 가득 띄웠다. 괜히 뜨끔해서 다니엘 눈치를 슬쩍 봤더니,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내의 꿈은 이민호와 결혼하는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숙소 바로 옆 고급 레스토랑이 마침 와이파이 스팟이라 잠깐 나가서 밀린 메시지 체크부터 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내리던 비는 갈수록 거세져서 화면을 터치하려는 내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다. 메시지함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 개씩 와 있었다. 좋은 소식은 바라데로의 레닌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바나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운 좋게도 이곳의 축제 날짜와 딱 겹쳤는데, 레닌에게 축제를 보러 아바나로 올 계획은 없는지 물어본 이메일에 긍정적 답장이 와 있었다. 나쁜 소식은 쿠바의 첫 친구가 되어줬던 대니와 30분 후 만나기로 했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는 탓에 약속이 취소되어버린 것. 이런 날씨에 오토바이를 타면 위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던 듯했다. 다른 날로 다시 약속을 잡고 싶었지만 남은 일정이 워낙 빠듯해서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저번의 짧은 인사가 마지막 작별이 되어버렸다. 정말이지 쿠바 일정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렇게 저녁 일정이 날아가버렸다. 밤 10시 즈음, 비가 사그라들자 허기라도 채울 생각에 다니엘에게 주변에 간단히 식사를 때울 수 있는 곳을 물어보고 다시 집을 나섰다. 그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걸어가자 우리나라의 포장마차 느낌의 허름한 간이식당이 하나 보였다. 이런저런 간식거리가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었으나 주문을 하려고 하면 자꾸 뭐라고 반문하는데 도저히 말이 안 통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계산대 뒤에 옹기종기 서 있는 직원들은 내가 스페인어를 못하니까 왠지 모르게 비웃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결국 그냥 아무 버거나 가리키면서 달라고 했다. 좀 전에 파리가 앉았다 간 버거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내 위장은 천하무적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1쿡을 지불하고 테이블에 앉아 버거를 허겁지겁 먹고는 다시 나서는데, 식당에 있던 남자가 따라 나왔다. 아까 직원들과 함께 서 있으면서 그나마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물론 영어는 단 한 마디도 못하니 의사소통은 안 되었지만. 그는 나더러 어디 사냐고 물어봤고, 사실 다니엘의 까사가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새 까사를 알아볼까 고민하던 나는 번역기로 그에게 숙소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따라오라고 손짓하곤 본인이 아는 까사에 이곳저곳 바로 데려가서 소개해 주었다. 마치 우리나라 시골에서 아는 이모나 할머니 집에 부탁하는 것처럼. 허나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던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그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는 매번 “아!”라고 일단 외쳐보고는 번역기에 뭔가를 한참 적어 보여주는 패턴이 있었다.


<남자친구 있어?>


번역기에 적힌 그 말을 보고는 이번에도 마찬가지구나 싶었다. 상대방이 영어를 못한다는 가정 하에서 이런 경우에 내가 터득한 스킬이 있는데, 바로 번역기가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못 알아듣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다시 외쳤다.


“아!”


<쿠바인 남자친구 안 필요해?>


“아!”


<같이 말레꽁에 걸으러 가지 않을래?>


되지도 않는 작업 멘트의 향연을 번역기로 보고 있자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오늘 막 아바나에 도착해 너무 피곤하니 이만 자러 가야 한다는 문장을 번역기로 보여주었고 그는 골똘히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마지막으로 외쳤다.


“아!”


<그럼 내일 시간 되면 만나자. 10시에 이 곳에서 기다릴게.>


다음 날 아침, 나는 8시 30분에 헐레벌떡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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