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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떠난 쿠바 여행 16. 인종차별

레닌과의 재회, 그리고 쿠바에서 체감한 흑인 차별

by 이다예

아딜슨과 작별한 후엔 바라데로에서 학생버스를 타고 온 레닌과 만났다. 그는 아바나에서 제일 유명한 젤라또 가게에 날 데려가더니 현지인들에겐 더 저렴한 가격으로 판다며 본인이 사겠다고 했다.


“내가 딱 봐도 외국인인데 할인을 해줄까?”


“우리 의대에 교환학생이 많이 오는데, 그중 하나인 척하면 될 거야. 누가 뭐라고 하면 무조건 ‘요 쏘이 드 엘람’이라고만 해.”


나의 걱정에 레닌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거짓말에 굉장히 약한 나는 줄 서있는 내내 속으로 요 쏘이 드 엘람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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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다운 기나긴 기다림 끝에, 다행히 별 의심을 받지 않고 젤라또를 사서 야외석에 앉을 수 있었다. 레닌에게 쿠바에서 있었던 다른 일들을 언급하며 알렉스 이야기를 해 주자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알렉스를 가리켜 ‘네 물라토 남자친구’라며 놀렸다. 물라토, 물라토…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단어인데. 물라토가 뭐냐는 내 물음에 레닌은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피부가 어두운 사람들을 꼽아내며 저들이 물라토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랐다. 메스티소, 물라토, 삼보. 중학교 사회 시간에 배웠던 내용이었다. 중남미에서 인종이 섞이며 태어난 백인과 흑인의 혼혈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물라토였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단어를 실제로 쓰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중학생 당시, 나는 이 단어를 내가 살면서 한 번이라도 쓸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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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동안 만난 쿠바인들은 다 흑인 계열이었다. 완전히 백인이었던 레닌을 제외하고는. 쿠바 사람들마저도 레닌을 외국인으로 착각한 채 스페인어를 못 할 거라고 넘겨짚어 나에게 대신 대답하는 우스운 상황도 몇 번 있었다. 그들은 레닌이 스페인어로 입을 열면 배신감이 스친 표정으로 어이없게 바라보곤 했다. 레닌은 오히려 본인이 외국인 관광객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어차피 그는 대다수의 쿠바인들과는 다르게 춤을 추는 것도 싫어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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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니가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쿠바는 흑인이 아무리 많아도 인종차별이 그대로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젤라또를 다 먹은 후 저녁이 되어 시내에서 열리는 축제를 구경하러 갔을 때, 엄청나게 몰린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입장 시 가방을 검사하고 있었다. 레닌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우리는 검사 안 받을 거야. 분명 흑인만 골라서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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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흑인들만 잡아 세워 가방을 검사하던 경비들은 우리 차례가 되자 무심하게 그저 손짓해서 보내버리는 게 아닌가. 대니, 알렉스, 아딜슨의 웃는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며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쿠바에서마저 인종차별이 만연하다니. 이들은 만에 하나 쿠바를 탈출한다 해도 또다시 쓰린 현실에 좌절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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