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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Feb 08.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4. 브라질 친구들이 선사해준 밤

[브라질, 포즈 두 이과수]

남미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 밤은, 내겐 너무나도 섬세한 감정선이기에 사실 글로 표현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정도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렇게 잘 통하고 끈끈해질 수 있구나-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던 시간.


가브리엘, 티아고, 로드는 내가 호스텔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을 보러 나섰다. 컴컴하고 조용한 길을 함께 걸으며, 그들은 그 날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왁자지껄 늘어놓았다. 이과수와 맞닿은 파라과이의 시우다드 델 에스떼는 국경 도시인만큼 온갖 물건을 값싸게 팔기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그만큼 정신없고 위험하기도 하다. 원래 휴대폰을 싸게 구입하려고 이곳에 간 이들은 고민 끝에 마약을 구입하기로 했는데, 흥정 끝에 굉장히 낮은 가격으로 사게 되어 대만족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호스텔에 돌아와서 케이스를 열어 보니 빈 상자였다고.



마트에 다다르자 세 남자 모두 매의 눈으로 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어려서부터 요리를 배워서 자신감이 넘치던 가브리엘은 야채를 골라내는 솜씨도 남달랐다. 브라질 음식은 콩과 밥이 어김없이 포함되는데, 여기서 사소한 지역 갈등도 볼 수 있었다. 콩 종류를 가지고 상파울루 출신인 가브리엘, 티아고와 리우 출신인 로드가 티격태격하게 된 것. 위키에서 상파울루는 갈색 콩을, 리우에서는 검정 콩을 먹는다고 얼핏 봤었는데 그걸 실제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서로 각자의 콩이 최고라고 우기던 와중, 그동안 영어 쓰는 걸 극도로 부끄러워하던 로드가 내게 검정 콩 한 봉지를 들어 보이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존X 맛있어(This is fucking good).”



그들은 꽤나 열악한 호스텔의 부엌 환경에서도 훌륭하게 음식을 만들었다. 온갖 음악을 틀고 춤추며 흥겹게 요리한 건 덤. 하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아 나눈 얘기들은 그와 상반되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무심코 그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냐고 한 나의 질문이 발단이었다.


“우린 같은 대학에서 시위를 하다가 만났어. 현 대통령에 대한 시위를 하는 단체에 우리 같은 학생들이 아주 많이 가입되어 있거든.”


“뭐 때문에 시위를 했는데?"


“지금 대통령은 한 마디로 브라질의 트럼프야. 위선자에 차별주의자.”


적응되지 않을 정도로 굳어진 그들의 얼굴과 격앙된 목소리에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티아고가 가족의 정치 성향에 실망해 떠나왔다는 이야기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는 이전 대통령도 온갖 음모를 꾸며서 몰아냈어. 그 후로 브라질이 더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 혐오가 만연하거든. 예를 들어, 브라질엔 토착 신앙이 기독교와 혼합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 특히 아마존 쪽에. 근데 이런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엄청나서, 심지어 진짜 돌을 던지거나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어. 문제는 현 대통령 하에 이건 처벌받지 않아. 그리고… 인종차별이나 동성애 혐오도 비슷한 맥락이고.”


동성애자인 로드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순박한 미소는 사라지고 침울한 표정만이 가득했다. 브라질은 흑인 비율이 높기로 남미에서 유명한데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문제를 여전히 겪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로드는 동성애자인 데다가 흑인, 그야말로 차별의 집중 대상이었다. 가브리엘은 흑인 혼혈, 티아고는 백인이었는데, 다행히 이 셋은 사상이 비슷해서 더 금방 친해진 모양이었다. 특히 티아고는 인종적으로 기득권층에 있으면서도 가족과 맞서면서까지 평등을 위해 애쓰는 게 대단해 보였다. 어린 나이에 나라 걱정을 행동으로 옮기던 피 끓는 청춘들. 나는 왠지 모르게 이런 고난과 억압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려서 눈물이 찔끔찔끔 난다. 물론 이후에 반대쪽 정치 성향을 가진 브라질 친구와 얘기를 나눠 보면서 양쪽의 입장을 골고루 듣고는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깨닫게 되었지만.



그날 밤의 마지막은, 음, 광란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칵테일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가브리엘은 브라질 전통주인 카샤사로 카이피리냐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포인트는 바로 브라질리언답게 엉덩이를 잔망스레 흔들어대며 술을 섞는 것. 설탕이 한가득 들어가서 그렇겠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달달하고 맛있는 술맛에 푹 빠져 끊임없이 마셔댔다. 그 와중에 티아고가 별안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익숙한 멜로디라 깜짝 놀라 들어보니 바로 드래곤볼 주제가였다. ‘Dan Dan(점점 마음이 끌려)’이라는 가장 유명한 주제가를 브라질에서도 똑같이 쓴다니! 곧 포르투갈어와 한국어로 부르는 드래곤볼 주제가가 호스텔에 울려 퍼졌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공통점으로 교감하면서, 한 번 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새벽 세네시쯤 됐을까. 우리는 호스텔 수영장에 둘러앉아 아쉬운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버스 시간에 맞춰 떠나야 하는 내가 짐을 챙겨 로비로 나오자, 나의 세 브라질 친구들은 차례로 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한 명 한 명 포옹하며 따뜻한 말을 건네는데, 꽉- 힘 있게 안으며 전해지는 애정과 아쉬움에 나는 그 날 온종일 공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우다드 델 에스떼로 향하는 외로운 버스 안에서, 그리고 파라과이에 도착한 후에 받은 가브리엘과 티아고의 영상편지를 보면서 괜스레 울컥했다. 너희들 덕분에 브라질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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