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새로운 시작
밤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머신을 켜면서 바로 앞에 있는 학교 건물의 시계와 운동장을 바라본다.
포슬포슬한 백설기 처럼 하얀 운동장이 사랑스럽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 나는 주방 창을 통해 한눈에 펼쳐진 학교 풍경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애 적응 못하면 내가 회사 때려치지 뭐.. 하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아무런 도움 없이 보내 봤던 1학년.
다행히 영리한 첫째군은 혼자서 척척 잘도 해냈다.
엄마 아빠 출근시간에 맞춰서 집에서 나가야 하니 어쩔수 없이 남들보다 일찍 등교하게 된 아이. 나중에 알고 보니 언제부턴가는 교실 문을 열고 선생님 오시기 전 아침 준비도 착착 하면서 기다렸다는 기특한 녀석.
하지만 내심, 큰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 등교하는 것이 마음쓰였으니, 초품아는 이래서 중요하구나.
다음번 이사할 때는 길 건너지 않는 곳으로 가야겠다며 결심했었다.
이사온 집은 학교가 진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있었으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나혼자 ’학교를 바라보며 아침밥을 먹으면 공부도 열심히 하겠구만‘ 하는 이상한 상상을 하며 학교가 보이는 자리에서 아침식사를 하게 해주겠노라고 아일랜드 식탁도 만들었다. 하지만 인테리어를 마치고 이사오던 날, 집이 호텔 같다며 신나서 좋아하던 아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니,
"악 엄마..이게 뭐야!! 집에서 학교가 보여!!!"
"와 이집 최악이다.. 뷰가 뭐 이래"
'응..???'
학교가 보이는게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끔찍한 일이었다니..
뭐 어쨌거나, 나는 좋다. 흥!
아주 가끔 휴가일때 커피 한 잔 하면서 바라보는 운동장 풍경. 체육시간에 우리 애가 있나 없나 뭐하고 있나 관찰하는 즐거운 시간. 너희들은 어땠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꿀맛 같았던 1년 조금 넘은 시간이 지나 어느덧 벌써 졸업이다.
졸업이라니.
통통한 손을 잡고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구나. 이제는 나에게 손 잡는것 따위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까칠하고 까칠한 녀석.
인스타에서 마음에 쏙 드는 꽃다발을 발견한 후 3주 동안 연락을 해서 겨우 겨우 주문한 꽃다발. 저녀석은 꽃에 관심도 없을텐데 나만 혼자 신남.
졸업식 꽃다발.
내가 '후리지아'라는 꽃을 처음 알게 된 것이 내 국민학교 졸업식날 이었으니, 그 날 우리 엄마는 후리지아를 한 다발 건네주시면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꽃 이라고, 향기 한 번 맡아보라고 하셨다. 차가운 겨울 코끝이 쨍해지는 상큼함에 깜짝 놀랐던 그 향기. 엄마가 돌아가신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후리지아 향을 맡으면 그 날이 생각난다.
첫째군의 졸업식에는 노란 튤립 사이로 학사모를 쓴 퐁퐁이를 준비했다. 웃는 모습이 꼭 너 같아서.
아침 일찍 주문해 놓은 꽃을 찾아오고, 혼자 신나서 이리저리 사진찍다보니 얼른 나가봐야 할 시간이다.
학교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주신 초대장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하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순간 멈칫.
해리포터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졸업로브를 입고 학사모를 쓰고 재잘재잘거리며 줄지어 강당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 한참을 바라봤다.
그래, 로브 입는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얘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로브'라는 단어를 쓰는구나. 몇 해 전 여행갔던 동남아 한 호텔에서 수영장에서 너무 추워서 '가운이 있냐, 가운좀 달라' 얘기하는데 못알아들으셔서 이런저런 바디랭귀지를 다 동원해서 설명하고 결국 한참 후에야
'Ah.....robe??'
라고 겨우 겨우 소통이 된 후, 내 영어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던. 로브가 대체 뭐람… 가운이지.
졸업로브 입는다고 어제 들었으면서도 아침에 이 티셔츠 입어라 저 티셔츠 입어라 아이랑 한참을 티격태격. 결국, 가운 위로 티셔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다는걸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깨달은. 참 아이 말 안 듣는 엄마라니.
하얀 눈 길 위에서 예쁜 졸업로브를 입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반짝거리는 금빛 풍선으로 장식된 강당은 아이들의 의상과 어울려 졸업식의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졸업장 수여의 시간. 학생 한 명 한 명 정성껏 소개해주시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떨려서 괜히 나도 같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애 반도 아닌데 혼자 훌쩍훌쩍 울기 시작)
더 깜짝 놀랐던 건, 졸업장을 나눠주시던 하얀 정장을 입은 젋고 세련된 선생님이 교장선생님 이었다는 것. 교장선생님께서는 그 아름다운 모습 만큼이나 인상깊은 축사를 해주셨으니
'...오늘 눈이 소복소복 내렸어요….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작은 행복들이 소복소복 쌓여나가기를 바랍니다..'
소복소복
오늘 참 예쁘게 마음에 내린 말..
하얀 눈처럼 소복 소복..
졸업식이 끝나고 재빨리 포토존에서 가족 사진을 찍은 후 친구들과 사진을 좀 더 찍고 싶다고 해서 다시 강당으로 올라갔다. 그래 친구들이 훨씬 소중할 나이지. 어느 덧 나보다 훌쩍 커 버린 녀석.
너에게 졸업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부터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 펼쳐질거야.
친구들과 한창 어울려 다니겠지..
부럽다.. 좋을 때다!!
마음껏 즐기고 신나게 누려보자..
(이제 진짜 시작이지? 너의 사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