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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Mar 03. 2023

겨울과 봄 사이, 시금치의 계절

시금치 나물과 비빔밥

긴 긴 겨울 방학. ‘배달 데이’ 하루를 빼고는 주4회 점심, 그리고 가끔 저녁까지 스스로 챙겨 먹어야하는 아이들의 주 메뉴는 3분 카레, 냉동 치킨너겟, 소세지 등등… 어느 날 아이들이 이야기 했다.

엄마, 나물 반찬좀 해놓고 가

응?? 나물??

요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철부지 시절에 덜컥 결혼할 때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뭐라도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땐 몰랐지.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질게 없다는걸. 내가 할 줄 아는 나물이라고는 여전히 시금치, 콩나물 뿐인 것을.


얼마 전 할아버지 제사 때 급하게 내가 나물을 준비해야 했는데 사 가면 될 것을 굳이 직접 만들겠다고 큰소리 리를 탕탕 쳤다. 금방 하니까 아침에 하면 되겠지 뭐 하고 시작했다가 결국 고사리 때문에 혼이 났던 일. 데친 고사리를 샀기에 대충 양념해서 볶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녀석은 왜케 힘이 센지. 아무리 볶고 볶아도 연해지지 않아서 결국 머리에 고사리 냄새가 잔뜩 배인 채로, 다시는 널 얕보지 않겠노라 두 손 들었던 기억.


어쨌든 아이들이 해달라니 해보자. 마트에 갔더니 이 계절 가장 좋은 시금치가 가득 쌓여 있다. 무려 세일도 산다. 호기롭게 두 봉지 구입.

그래도 그 동안 발전한 것이 하나는 있었으니, 손놀림의 빠르기는 절대 아니고(예나 지금이나 손이 느린) 오직 잔머리 이다. 10분 안에 끝내주겠노라.

먼저 물을 올려 팔팔 끓여두고, 시금치는 묶음을 풀지 않고 머리부터 쳐낸다. (풀어헤치기 시작하면 일이 커짐) 댕강댕강. 하나씩 다듬는 정성을 보이다가는 저녁 반찬에 시금치 하나 놓고 먹게 되는 수가 생기니 한번에 빨리빨리 툭툭 쳐낼 것. 그리고 흙이 가장 많이 묻은 부분이니 이 부분 위주로 한 번 씻은 후에 뿌리쪽 부터 입수. 어차피 이렇게 씻고 나서 데칠 때 또 씻겨지고 데친 후에 다시 한 번 찬물에 헹굴 것이니 열과 성을 다해 박박 씻을 필요가 없다. 후루룩 헹궈내고 나면 물이 끓고 있다. 그러면 집게를 집고 시금치를 끓는물에 퐁당 넣고 한번 뒤적인 후 곧바로 뺄 것. 숨만 죽으면 바로 빼내야 한다. 그게 시금치 나물의 핵심.

시금치가 파랗게 데쳐지는 순간이 좋다. 이 계절 가장 예쁜 초록이들. 이제 슬쩍 물기를 짠다. 세게 짜면 물러지니 안되고 슬쩍. 시금치는 금방 물러져서 잘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지만 오히려 나는 손이 빠르지도 야무지지도 못해서 이렇게 슬쩍 하는 요리가 참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소금 솔솔, 참기름 휙휙, 마늘약간, 깨 듬뿍 넣고 살살 무치면 끝. 세상 간단한데 너무 맛있다. 대충 해야 맛있는 음식. 오래 데쳐도, 꼭꼭 짜도, 세게 무쳐도 안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 뚝딱 해야 맛있는 아이. 특히 이 계절 시금치는 단맛이 있어 소금간만 되도 정말 맛있다. 게다가 비타민, 철분, 식이섬유 등 각종 영양소도 풍부하니 마트에 갈 때마다 빠짐없이 데려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 두면 며칠동안 반찬으로, 비빔밥, 김밥으로 알뜰하게 활용할 수 있다. 어떤 날은 계란후라이 뚝딱 부쳐서 있는 거 대충 넣고 쓱쓱 비벼 아침으로. 겨울 방학 내내는 아이들 점심 반찬으로. 덕분에 올 겨울방학도 잘 넘겼다.



퇴근 후 딱 30분, 후다닥 저녁을 차리고 얼른 먹이고 다시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러 나서야 하는 시간. 그래도 사 먹는 음식보다 집에서 밥과 반찬을 해달라니(사먹어도 되는데), 그리고 이렇게 대충 해줘도 한 그릇 뚝딱 잘 먹고 나가니 고마운 아이들. 영양 만점 시금치 나물 먹고 기운도 세지고 쑥쑥 자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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