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40대 후반의 여성이다. 실은 친분이 크지 않고, 오고 가며 몇 번 봤으며 그의 공간에 초대받아 밥을 한번 먹었던 것이 우리 관계의 전부이다. 다시 말해 나와 그녀는 그냥 어쩌다 아는 사이이다.
허는 야무지게 작은 눈을 가진 두리뭉실한 체형의 여성으로, 웃음소리가 매우 크고 옥타브가 높다. 그녀가 아하하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아하하하 라며 하를 하나 더 붙여 웃게 된다. 허의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내가 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그가 쓴 글을 읽은 후부터였다. 도입부가 인상적이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백수다. 앞으로도 돈을 벌 생각은 없다. 난 지금 백수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다.
삶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인간을 무언가의 전성기를 맞이했던(전성기가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면 허는 전자였다.
나의 전성시대를 떠올려본다.
있었던가?
나는 후자에 속한다.
허가 수 십 년 만에 고향에 내려와 정착한 곳은 전세 500만 원(5,000만 원이 아니다)의 한 주택이었다. 집주인이 급히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버려지듯 방치된 주택의 가격은 매우 저렴했고, 때마침 주인이 살림살이까지 버리고 나가니 허에겐 새로운 살림살이를 구매할 일도 덜어졌다. 그녀가 가진 조건으로는 최상의 집이었다.
자녀가 조금 크면서 허는 자녀의 학교 가까이에 있는 마을로 이사했다. 전세 500만 원짜리 집보다 더 저렴했다. 빈집이었기 때문이다. 아궁이가 있는 흙집이었고 마당에 작은 텃밭까지 있었지만 공짜였다. 생각하건대 그 집을 발견하고, 그 집에 살아도 된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분명 허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를 더 올려 아하하하 하며 웃었을 것이다.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지출이 그녀 삶의 목표였다. 버려진 나무로 난방을 때고 간혹 친구들이 보내준 옷, 이불, 가방은 이웃과 나누거나 텃밭 일을 할 때 작업복으로 썼다.
텃밭은 허가 ‘최소한의 지출’이라는 목표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마당 텃밭에 파, 부추, 상추, 시금치, 고추를 심었고, 하천 옆이나 동네의 버려진 땅을 찾아 콩이나 옥수수, 호박, 들깨, 감자를 심었다. 어떤 날은 산이나 들로 나가 냉이, 달래, 미나리, 고사리를 뜯어 반찬을 했다. 농사한 콩으로 간장, 된장을 담가 먹었고, 김치는 되도록 많이 담가서 독에 저장하니 일 년 내내 묵은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는 모아 퇴비나 닭 모이로 썼다.
허가 농사를 짓기 위해 버려진 땅을 찾았을 때 그것은 실은 버려진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사람 손을 덜 타고 덜 관심을 받는, 다시 말해 땅의 값어치가 높지 않아 놀고 있는 땅일 뿐이다. 그녀는 그 땅을 버려진 땅이라고 표현했다.
자급자족을 시작하니 식비가 줄었고 소비가 줄어들었다. 대신 좀 더 바지런해졌고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 확신이 백수의 전성시대를 일구기 시작했다.
허는 사교성이 좋다. 낯선 이와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고, 관계를 머뭇거리지 않는다.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주저와 머뭇, 긴장과 초조를 빼고는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없는데 말이다. 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시끄럽고 주목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가끔 허가 끄집어내는 대화의 속도와 총량을 따라가기가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럴땐 그냥 웃는다. 그러면 허는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무작정 아하하 하고 같이 웃어버린다. 내가 허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순전 그 웃음 소리 때문이다.
주저와 머뭇이 없는 허가 주저와 머뭇에 긴장과 초조까지 더해진 나를 초대한 건 얼마 전이다. 햇빛이 창끝처럼 따가웠지만 공기는 쾌청했고 나는 폐까지 말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차로 지나 한 마당에 당도했다. 멋대로 자란 풀과 잡동사니가 헝클어져 있었고 손님을 위한 식탁이 펼쳐져 있었다. 풀밭 위의 식탁이라니..! SNS에 올리면 좋아요를 평소보다 두어 개는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핸드폰 카메라를 연신 눌렀다. 비록 그녀가 직접 만든 천연 살구 에이드를 마시며 탄산수 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보고 말았지만..
허가 우리를 초대한 그녀의 공간이다. 의자와 테이블, 옷걸이와 화덕 등을 모두 주어왔다.
허의 마당을 통해 그녀가 외쳤던 백수의 삶에 대해 목격할 수 있었다. 버려졌던 마당에는 인근 시골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버린 낡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었고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져있던 신발장과 옷걸이도 놓여있었다.
낡은 것들은 시한부의 기간이 끝나면 곧 버려진다. 보편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보편적이지 않게 허에게 ‘버려졌다’는 것은 다시 말해 ‘주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쓸모를 잃은 사물들은 그녀에게 주어져 다시 쓸모를 시작했다.
버려진 헌 옷을 주어 입었다는 허를 바라보며 그녀가 몸매를 드러내는 실키한 재질의 드레스를 입고 그녀의 집 보증금보다 비싼 백을 들고 발을 날렵하게 감싼 수제화를 신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것도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아니 실은 그 모습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차림을 한 허는 두 옥타브를 내려 아하하... 라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허가 차려준 밥상.
인간은 너무 많은 소유를 한다. 소유와 함께 따라다니는 동사는 ‘버리다’이다. 소유했지만 유행이 지나, 혹은 낡은 것들은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것을 소유한다. 둘 사이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허는 말한다.
줍는 것이 임자죠.
소유는 가끔 뻔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허의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는 자연인이다. 소비를 줄이고 많이 존재하고 고쳐서 쓰고 버려진 것을 활용한다. 그리고 자유롭다. 시간이 많으니 이웃을 돌볼 수 있고 나를 돌볼 수 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할 수 있다.
백수이자 자연인인 그녀를 사람들은 매번 놀라운 듯이 바라본다. 종편에서 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꽤나 인기가 많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도시 혹은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갔을까? 아마 짐작도 못할 많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자연인 프로그램의 출연자들만큼 하드코어적이진 않지만 어쨌든 자연인인 허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 많이 궁금하지만 아직까진 그냥 어쩌다 아는 사이라서 물어보진 못했다. 언젠가 꼭 한번 허의 사연을 들어보고 싶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직 사연이 부족하다. 백수가 될 자신이 없고 자연인이 될 명분이 부족하다. 그래서 오늘도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하고 노동을 마친 나를 격려하기 위해 집 앞 스타벅스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