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스 Jun 23. 2020

싹을 틔우다니, 너 대단하구나!

요즘 야마자키 나오코라의 '햇볕이 아깝잖아요_나의 베란다 정원일기'를 읽고 있다. 저자가 좁은 베란다에서 작은 정원과 농장을 가꾸면서 적은 일종의 식물 기록이다. 읽고 있으면 그동안 지나쳤던 식물의 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말을 하고 움직이지 않아서 주목하지 않았던,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을 지나쳐왔던 식물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아마추어급에도 못 끼는 초보 식물러이다. 지난해 11월께 마오리 소포라를 선물 받고 처음으로 집에 식물을 데려왔는데 그 이후 조금씩 재미를 느껴 하나둘 식물들을 들여왔다.

식물을 키우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은 '기특함'이었다. 가냘픈 소포라의 줄기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난 연녹색의 잎을 보면 마음이 벅찼다. 조금의 물과 조금의 햇빛만을 보여줬을 뿐인데 스스로 잎을 틔우다니, 너 정말 대단하구나!

물론 이 기특함은 자책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잎이 떨어지고 색이 변하면 '물을 너무 많이 줬나', 혹은 '빛을 너무 많이 보여줬나'라며 나의 무지에 대해 탓하는 것이다.    


새잎을 낸 기특한 소포라.


나오코라의 책을 읽으면서 '새싹채소'에 대해 알게 됐다. 키우는 방법이 매우 간단하다. 바닥에 키친타월을 두세 겹 깔고 물을 적신 후 씨앗을 뿌린다. 이후 하루에 3,4차례 물을 뿌려 주면 일주일 후에는 수확을 할 수 있다.

야밤에 책을 읽으면서 새싹의 탄생을 눈으로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던 난 다음날 바로 집 근처 농약판매점을 찾아 새싹채소 씨앗을 두 봉지 샀다. 브로콜리 씨앗을 사고 싶었지만 없었고, 대신 적양배추와 무순 새싹을 샀다. 무엇이든 어떠하리. 난 새싹의 탄생을 보고 싶은 것인데.    

 

씨앗을 뿌리고 다음날 바로 싹이 났다. 어처구니없이 귀여운 싹이다. 갈색의 껍질을 벗고 밤새 발아한 적양배추. 잔뿌리가 마치 곰팡이가 핀 거처럼 하얗다던데 정말 그랬다. 어제까지는 단단하던 작은 씨앗이 오늘은 뿌리를 가진 연한 식물이 됐다. 기특했다. 해준 것 없는데 이렇게 싹을 피워내다니, 너 대단하구나!     


가드닝을 하다 보면 다양한 기쁨을 맛보지만, 역시 싹이 틀 때가 가장 빛나는 순간인 것 같다. 나는 스물여섯에 작가로 데뷔해 이제 겨우 아홉 해를 넘겼으니 아직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천천히 문학의 길을 밟아가며 위를 향해 올라가야 한다. 어쩌면 먼 미래에 내 작품이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작가로서 기념할 만한 시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데뷔했을 때만큼의 흥분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첫 싹을 세상 밖으로 내밀 때가 절정이니까.   

- 햇볕이 아깝잖아요, 야마자키 나오코라


작은 씨앗에 생과 사, 삶과 죽음이라는 무겁고도 진지한 철학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명제가, 소름 끼치게 아름답고 신기하다. 그리고 이 생명의 싹이 트는, 가장 빛나는 순간을 내가 지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좋다.

광활한 우주에 속해있지만, 정작 집중하는 것은 현실이라는 눈앞의 것들이다. 좁은 시야의 일상에서 내가 아닌, 무언가의 생명에 관여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근사한 경험이지만, 어깨가 무겁고 책임감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식물이기에 좀 더 죽음을 쉽게 생각하게 되고, 죽음을 함부로 경험하게 될까 봐서이다.     


뿌린지 다음날의 적양배추 새싹.

오늘로 새싹채소의 씨앗을 뿌린 지 5일째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금 더 자란 새싹을 확인한다. 순간순간 커가는 모습에 또 마음이 벅차다. 오늘도 말해본다. 적양배추 너 기특하구나!    


새삼 깨닫는다. 무언가를 향한 조건 없는 칭찬과 마음을 쓰는 일이 참 오랜만이란 걸. 이래서 생은 긍정적인 것이다. 새싹의 에너지가 나에게 옮겨와 오늘을 살아가는 양분이 된 기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