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와 털

전 프로거짓말쟁이 입니다만, <15>

by 유스

보통 초등학생이 정도가 되면 호르몬의 영향으로 남녀 몸에는 변화가 생긴다. 키가 커지고 몸무게가 늘고, 여자는 월경을 시작하며 남자는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등의 변화를 겪는다. 여드름이 나는 아이들도 있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 '2차 성징'을 겪었는데, 또래들에 비해 제법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유치원 때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컸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브라자를 찼다. 당시 반에 브라자를 찬 여학생이 몇 없었는데 아마 나를 포함해 두세명 정도 됐을 것이다.


그땐 브라자를 차고 학교 가는 게 참 싫었다. 쉬는 시간에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브라자 뒷 끈을 튕기고 다녔는데(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땐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곤 했다.) 그게 정말 싫었다.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면 역시 더 했다.

그 장난을 치는 두 명의 남학생이 있었는데 몇 년 전 그 두 명 중 한 명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일이 있었다. 난 첫눈에 그 녀석을 알아봤다. 그 녀석은 내게 "어라, 나 기억하네?"라고 놀라워했다. 난 미소를 지었을 뿐, 차마 "당연하지. 내 브라자 끈을 그렇게 튕긴 놈인데 어찌 잊겠냐"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초등학교 때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음부에도 털이 자랐다. 이건 브라자 보다 훨씬! 정말! 매우! 싫은 변화였다. 난 매일 샤워를 하며 내 음부의 털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그 연약한 살에서 구불구불한 털을 뽑기엔 아팠고 그래서 꾹 참아야 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시절을 화려하게(?) 마무리할 6학년 수학여행 기간이 다가왔다.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오는 설렘은 둘째치고 난 이내 공용 샤워실에서 내 음부의 털을 보여야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걱정을 안고 있었다. 너무도 끔찍했다. 그땐 나처럼 브라자를 찬 애들도 얼마 없었으니 털이 나기 시작한 애들이 많이 없었을 것이었다.


같은 반 친구 다본이한테 질문의 저의를 감추고 물었다.

"야. 너 수학여행 가서 샤워할 거냐?"

다본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응. 자기 전에 씻어야지."

미나한테도 물었다. 미나는 "머리는 안 감을 것"이라고 했지만 어찌 됐든 샤워장에는 들어간다고 했다. 난 절망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혼자 털에 대한 고민으로 전전긍긍하던 난 큰 결심을 하고 가위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은 소심하게 난 음부의 털을 가위로 과감하게 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뿌리에 가깝게 싹둑싹둑. 가위 날의 그 차가운 느낌 아래 욕실 바닥에는 몇 가닥의 털들이 떨어져 있었다. 잘 가라 나의 털들!


털이 안 난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난 것도 아닌 애매한 음부를 작은 팬티 속에 감추고 난 보다 당당한 마음으로 수학여행 길에 올랐다.

선생님 몰래 술을 마시느니 마느니, 남자애들 방에 가느니 마느니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수학여행의 밤, 샤워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그날 밤 결국 씻지 않고 이불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샤워를 하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행 전 시행된 나의 표본조사가 엉터리였던 것이 드러난 셈이다.

늦은 밤, 낯선 곳에서 하룻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내 머릿속에선 '털 괜히 잘랐다'라는 억울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임신 20주가 되면서 배가 급속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그다음 날부터 배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정말 인체의 변화는 신비롭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출산에 대해서도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출산 전 준비해야 되는 사항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그때 알게 됐다. 출산 당일 산모는 ‘회음부 절개, 관장, 제모’라는 3대 굴욕을 겪게 된다는 것을. 굴욕 3 대장을 쓰리 캄보로 그 기념비적인 날 겪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제모의 경우, 출산 전 미리 하는 임산부들도 많다. 임신을 하면 보통 호르몬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분비물이 많아지는 데, 이때 왁싱을 해놓은 상태라면 질염 등에 걸리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한다. 특히 출산 후에는 4~6주가량 오로(자궁 내벽과 남아있는 양수들이 배출되는 것)가 콸콸 쏟아지는데 이때 왁싱을 해야 불편함을 줄이고 위생적으로도 좋다.


난 왁싱 숍을 돈 주고 갈 생각도, 그렇다고 연약한 부분에 왁싱 크림을 바를 각오도 없기 때문에 시험 삼아 집에서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랬던 것처럼 가위 하나를 들고선 남편 바리를 화장실로 불러냈다. "화장실로 좀 와봐. 할 일이 있어"라며.


바리는 제법 침착했다. 자신의 전동 면도기를 든 그는 근엄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심호흡을 했다. 어릴 적 뭣도 모르고 겁 없이 차가운 가위 날을 갖다 댔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전동 면도기를 내 몸에 대본적도 없는데 하필 그 시작이 나의 연약하고 소중한 부위라니.

나는 "첫 시도부터 전동 면도기는 조금 과감한 거 같아. 눈썹 가위로 타협하면 어떨까?"라며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전동 면도기를 든 그는 단호했다. 아니, 날 믿어봐. 하나도 안 아파. 나 믿지?


실랑이 끝에 드디어 전동 면도기의 전원이 켜졌다. 찌이이잉-. 두렵다. 정말 가위는 안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초등학생 시절 처음 자라 처음 잘림을 당한 뒤 자리를 잘 고수해왔던 나의 털들이 한 올 한 올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아, 잘 가라 나의 털들!


전동 면도기 왁싱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른 아침 갓 면도를 끝낸 남편의 매끄러운 얼굴처럼은 아니었지만 수풀처럼 무성했던 '그것'들은 사라졌고 꽤나 단정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작업자 바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의기양양하게 샘솟아 있었다. 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우리는 첫 왁싱을 자축하며 짝! 소리 나게 하이파이브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우리는 몰랐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삐죽삐죽 자라 움직일때마다 날 간지럽히고 따끔거리며 괴롭힐 그 털들의 성장의 속도를....


난 임신 후 신기하게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고, 다리의 털이 자라지 않는다. 출산 후 얼마나 빠질 것이고 얼마나 빨리 자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그렇다. 난 삐죽거리는 음부의 털 역시 다리의 털처럼 자라지 않을까 몹시 긴장했지만 다행히 이 녀석은 잘 자라주었다. 털을 괜히 잘랐다며 후회했던 초등학생이 이제는 내 인생에 왁싱이란 없을 것이라며 다짐하는 임산부가 되기까지 시간은 이십년이 훌쩍 지났지만 어째 후회하는 내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걸을 때마다 털들이 따끔거려 괴롭다는 내 호소에 친구 가녕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병원 가면 알아서 다 밀어줘. 굴욕은 뭘 굴욕이야. 아파 죽겠는데 그런 거 생각할 틈이나 있겠냐? 그냥 길렀다가 그날 잘라. 뭔 사서 고생이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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