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을 읽다 문득 무언가를 쓰고 싶어 끄적이는 한 편의 일기이다.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를 읽던 중이었는데 작가가 매일의 일기를 시작하는 방식인 '이 글은 ~ 쓰고 있다'라는 방식을 흉내 내 보고 싶었다.
며칠 전 엄마 영에게 헤어드라이기를 깜짝 선물로 보냈다. 몇 달 전부터 헤어드라이기에 찬 바람이 나오면 좋겠다고 몇 차례 이야기했던 그이기에 헤어드라이기 선물은 그를 무척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의 기대와는 달리 그 드라이어는 완벽한 냉풍이 나오는 드라이어가 아닌 그저 덜 뜨거운 송풍이 나오는 드라이어에 불과했고, 게다가 나는 몇 푼 아껴보겠다며 '최고급 B급 리퍼 제품'이라는 타이틀로 뜬 핫딜의 드라이어를 12,000원대에 구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수제비 반죽처럼 부풀어 오른 영의 기대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영은 찬 바람이 나오는 드라이어를 갖고 싶다고 몇 차례 이야기했던 것처럼, 드라이어가 무겁고 찬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며 몇 차례 더 이야기했다.
그리고 쐐기를 박아 말했다.
"이거 중소기업꺼구만?"
다이*급까진 아니어도 비달*순 급은 샀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 봤자 영의 기대를 충족시킬 순 없었겠지만.
그래서 처음 보는 브랜드에 돈 아끼려 리퍼 제품을 구매했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이거 얼마 줬냐"라고 묻는 영에게 "2만 원대.."라고 거짓말까지 해버렸다. 다시 드라이어를 알아봐야 한다. 냉풍이 나오는 10만 원대 브랜드 있는 드라이어로.
남편 바리는 축구를 하러 저녁 7시 반에 집을 떠났다. 축구가 8시에 시작하고 지금이 8시 48분이니 아직 경기가 끝나려면 1시간 12분이 남았다. 낮에 내린 세찬 소나기로 대지는 영의 헤어드라이기에서 나오는 덜 뜨거운 송풍 정도로 식었다. 마침 밖에 바람도 살랑살랑 분다. 바리와 그의 단원들은 축구하기 좋은 날씨라며 웃고 있을 것 같다.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다. 오늘로 임신 30주 4일째다. 실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 5일째인지 4일째인지 6일째인지는 확실치 않다. 병원에서 정해준 출산일로부터는 66일 남았다. 오전에 바리가 디데이 '육땡'이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임신을 하고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별땡그램을 시작했다. 그것도 열심히. 이유는 별땡그램을 통해 할 수 있는 아이용품 이벤트 응모가 많기 때문이다. 그 간명한 이유 하나로 나는 요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별땡그램의 늪에 빠져있다.
시작은 새로운 계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정에 최대한 내가 아닌듯한 느낌의 화법과 사진으로 게시물을 하나씩 올려야 했다. ‘내가 아닌듯한’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이유는 이벤트에 당첨되기 위해서는 아부도 해야 하고 가끔은 거짓에 가까운 과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짜 선물을 위해 아부하고 거짓으로 관철된 일상을 이미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광고하듯 대문짝 하게 걸어놓는 것은 내 인간적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계정은 일제 치하 비밀결사단처럼 철저히 비밀리에 운영되어야 했다. 가끔 사진과 다량의 이모티콘으로 도배한 내 게시물을 보고 있자면 나는 다중이인가,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곤 한다.
별땡그램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관문은 사진이다. 대략 이런 식이다.
- 원하는 사진
(얼굴에 자신이 없어) 내 얼굴 노출은 되지 않되 오늘 입은 꾸안꾸 스타일의 옷은 노출하고 싶다.
무심한 손동작으로 커피잔을 들락 말락 하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신중하게 골라 찾아온 카페인만큼 카페의 인테리어도 별땡그램 감성으로 담겨야 한다.
- 실제 상황
남편 바리가 그 커다란 몸에서 땀을 대량 방출하면서 쭈그리고 앉아 내 사진을 찍고 있다. 불만은 있지만 결코 입 밖으로는 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아 입을 앙다문 채.
->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지만 여간해서는 원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 "다시. 이게 아냐. 제대로 해봐." 바리가 입을 더 앙다문다.
-> 시간이 흐른다. 5분, 10분...
-> 결국 찍은 사진 중에 하나로 타협한다.
-> 별땡그램에 게시물을 올린다.
-> "남편과 함께 카페 놀이 중♥ 어쩌고 저쩌고."
-> 바리한테 좋아요를 누르라고 강요한다.
땀 흘리는 바리를 보며 나도 참 지독한 넘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극한직업'이라고 생각하며 애잔하게 그의 땀을 닦아주려는 찰나 카페 곳곳에 땀 흘리는 다른 남성들을 보고 커피를 뿜어버린다.
그동안 별땡그램의 새 계정을 아무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전 친구 추천에 가까운 지인이 뜨는 것을 보고(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기반으로 뜨는 것 아닐까) 난 경악했다. 소심한 심장이 잘 달군 숯불에 노릇노릇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이 방법으로 비밀 계정을 운영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머리를 굴러 지인 모두를 차단시켰다.
(일단은) 이 계정은 내가 운영하지만 내가 아닌 또 다른 자아로만 운영되고 있다는 모토에 한발 더 가까이 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누군가 내 아부와 과장으로 관철된 sns를 보게 된다면 기꺼이 무시해주길 바란다.
본래 휴대전화를 들고 손가락을 꼼지락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매일같이 하고 있는 별땡그램은 매우 귀찮은 일과 중에 하나이다. 다른 이들의 게시물을 보고 좋아요를 눌러야 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작업인지 임신 전에는 미처 몰랐다. 영혼 없는 눈빛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하트를 전쟁 중 폭격 수준으로 마구 누른다. 팔로워가 늘어날수록 이 작업 시간은 길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나쁘지만은 않다. 게으름을 이겨내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결과 흔히 그들 사이에 ‘인친’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한 명 생겼고(각종 이벤트에 서로의 아이디를 태그를 거는 사이) 이벤트 상품을 2개나 받을 수 있었다. 시가로 계산하면 앉아서 6만 원가량의 부수입을 창출한 것이다. 물론 하트를 누르고 댓글을 다느라 피로해진 내 시력과 거북목에 대한 계산은 포함되지 않았다..
내일은 부수입 6만 원 중 4만 원가량을 차지하는 상품의 리뷰를 별땡그램에 올려야 한다. 공짜 상품을 받은 자의 의무이지만 이왕 올리는 거 사용자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만한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본다. 지난 4년간 콘텐츠 에디터로 일할 때보다 어쩌면 더 진지하게 콘텐츠를 생각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