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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 Nov 17. 2021

출산 21일차 일기

조리원 공동생활

2021년 11월 17일 날씨 맑음


내일 조리원을 퇴소한다. 원래 계약상으로는 하루 더 남았지만 병원 진료 관계로 자주 외출을 하다보니, 조리원에서 하루 이른 퇴소를 권고했다. 대신 아이는 하루 봐주는 조건이다. 아이를 놓고 난 내일 하루 먼저 집으로 돌아간다.


대략의 산모들은 일반적으로 조리원에서 2주간 '합숙'을 한다.

내가 묵는 조리원은 화장실과 샤워실이 공동이고, 식사시간도 함께 한다. 잠자는 방만 다르지 동선이 겹치고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적지 않다. 처음에는 이런 공동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했지만 열흘이 넘게 있다보니 이 생활도 서서히 적응이 되고 있다. 어떨 때는 제법 재미있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니 가족 외 누군가와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직장 연수 때문에 일주일간 동기들과 게스트하우스 한 방을 썼던 것을 제외하고. (그 일주일에 대한 별다른 기억은 없지만,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수건을 많이 쓴다고 구박했던 일은 생각난다.)


조리원에 있으면서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산모들을 통해 병원 사람에 대한 TMI를 들을 때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뒤에서 하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평소 꾹꾹 눌러온 이놈의 습관은 본능적으로 재미를 느껴버리는 것으로 튀어나온다.


이곳에서 들은 병원 TMI.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실력 좋기로 소문난 병원장은 바람을 한 차례 폈다.

병원장의 사모는 이 병원의 실세다

외래진료 카운터에 있는 목소리가 제일 큰 '왕고' 직원은 사모와 한편이.

'왕고'는 병원에서 왕따다. 그래서 밥도 집에 가서 먹는다.


정리하고 보니 이야기의 중심이 병원장의 사모이다. 실세는 역시 다르다.


병원을 포함한 조리원 직원 수는 40명이다. 유독 친절한 직원들이 많은데 조리원 퇴소 때 '친절한 직원 이름'을 쓰는 란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 적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름을 아직 몰라 단서를 찾아내듯 그녀를 보면 가슴에 수놓은 이름 자수를 더듬고 있다.


그녀는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다. 빈틈없는 일자 앞머리, 그것도 눈썹 위로 반듯이 자른 앞머리에 뒷머리는 바짝 당겨 묶었다. 말씀도 조용조용하다. 어제 밤 내 방 문을 노크해 "산모님 불편한데는 없으신가요?"라고 물을 땐 심지어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앞머리를 본 한 산모가 말했다.

"그거 생각나네. 영화 마지막 황제."

난 산모의 표현력에 물을 뿜었다.


실은 '친절한 직원 이름'에 적고 싶은 다른 후보가 한명 더 있다. 신생아실에 있는 조무사 아주머니인데, 안타깝지만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아마 마지막황제와 신생아실 그녀 중 이름을 먼저 알게 된 이의 이름을 적고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신생아실 그녀는 50대 가량의 평범한 단발머리 조무사이다. 그녀가 내 마음에 들어온 순간이 있었는데, 그날 역시 다리를 절뚝거리며 우리 아가를 보러갔던 날이다. 그때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내 아가를 데리고 유리창 면회 공간으로 나왔다. -며칠전 일기에서 썼 조리원에서 나와 내 아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는 조리원의 슈퍼스타-


내 아가는 역시 잠을 자지 않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고, 나는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죄책감에도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아가를 앞에 두고 그만 아이처럼 어버렸다. 두리번 거리는 내 아가는 유리창 밖 펑펑 우는 엄마를 신기한듯 바라본다.

단발머리 조무사는 서둘러 유리창 밖으로 나와 우는 나를 달래줬다. 마음 아프게 왜 우냐며. 아기들은 잠을 잘 때도 있고 안 잘 때도 있다며. 수면 패턴이 바뀌기도 하니 마음 쓰지말라.

아무것도 모르는 겁많은 쫄보초보맘한테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단발머리의 그녀. 난 그날부터 그녀가 보이면 넙죽 인사를 한다. 우리 아를 예쁘게 봐달라는 부모의 마음을 담아.


입원실에서 회복하며 비싼 수액을 맞았다. '약빨'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적응.

아가들은 원더웍스(wonder weeks)라는 기간을 지낸다 한다. 아기가 정신적, 신체적 성장을 하는 시기로, 잘 지내던 아기가 짜증이 늘고 울고 보채며 양육자를 힘들게 하는 시기. 20개월의 성장시기까지 대략 10번의 원더웍스가 온다.


자신도 모르는 성장. 실은 인간에게 원더웍스는 10번이 아니라 100번은 오는 것 아닐까.

난생 처음 출산을 하고 잠 못자며 괴로워했던 지난 일주일도 어쩌면 나의 원더웍스였고,

출산을 경험하며 도드라진 몸뚱이의 고통도 지독한 원더웍스 기간이 아닐까.


그러니까, 신생아들의 원더웍스는 결국 잠잠해지니까,

나의 이 생경한 환경과 고통도 사그라지지 않을까.

하여 다시한번 기도문을 쓰는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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