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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출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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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스 Nov 21. 2021

출산 25일 차 일기

이토록 행복한, 결혼기념일

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날씨 흐림


칭얼대는 아이를 재우고 남편 바리와 함께 간단한 아침을 먹고 쓰는 일기이다.


집에 온 후 육아는 남편 바리의 몫이다. 나는 고작 의자에 앉아 아이를 가끔 안아주는 역할밖에. 그래서 잠 못 잔 얼굴의 바리가, 얼굴이 빨개진 딸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바리가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맙다.


지난 새벽, 아이는 그 전날보다 더 많이 잤다. 낮잠을 거의 안 자서 잠투정이 심하더니 밤에는 통으로 4시간가량을 잤다. 그동안 나는 침대에서 혼자 편히 잤고, 바리는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있었다.

아이가 통잠을 잔다고 해도 중간중간 불편해하고 낑낑대기 때문에 바리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아침 7시, 대변을 싼 아이를 씻기고 눕힌 후 바리가 안방으로 들어온다. 침대에 누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밤새 다리는 더 아프지 않은지,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본다.

그리곤 그는 "임신하자고 해서 미안해."라고 내게 사과를 한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 뭘 사과를 해 이 양반아.

바리는 늘 내 말문을 막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의 다정함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아침이다.


조리원으로 옮기기 전, 입원실에 7박 8일 있는 동안 내겐 많은 일이 있었다. 아니, 일보다는 많은 생각으로 괴로웠던 시간이었다.

남들 다 한다는 제왕절개 수술, 그래서 우습게 생각했던 수술이 생각보다 벅차고 긴장되는 경험이었고, 그 회복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수술 후 생애 처음 느껴보는 오한, 마치 냉동창고에 알몸으로 버려진 듯한 그 오한과 그로 인해 생긴 최악의 목감기, 그리고 마치 공황장애적인 심리적 압박감은 회복실에 놓인 나의 24시간을 더없이 괴롭고 열악하게 만들었다.


몸 회복을 해야 할 입원실에서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출산 후에는 임신 때 아팠던 게 싹 낫는다"라고 했던 의사와 지인들의 말을 굳게 믿었던 나는 임신으로 생긴 다리 불편함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면서 지옥 같은 절망에 빠졌고, 밤만 되면 회복실에서의 공포감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다. 입원실을 벗어나 마냥 집에 가고 싶었고, 집에만 가면 잠도 잘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물론 아니었다.)

바리는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마른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조리원 입소 대기가 걸려있는 이틀간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좌)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초가 녹을 때 나는 바리를 안고 엉엉 울었다. (우)바리가 사다준 디카페인 라떼. 역시 사이즈는 벤티.

그날은 결혼기념일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나 혼자 만든 극강의 고통과 아픔에 파묻혀 날짜가 가는지도 몰랐던 그날, 바리는 병실로 돌아온 내게 작은 케이크와 커피로 깜짝 파티를 열어주었다

바리는 직장과 병원을 오가며 바빴던 전날 내가 맛있게 먹었던 타 지역의 치즈케이크를 미리 준비했고, 퇴원 수속으로 바쁘던 그날 아침 근처 스타벅스에 들려 따뜻한 디카페인 라테를 준비했다.

조촐한 그 선물 앞, 여전히 지옥에 빠져있는 내게 "오늘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야. 고마워."라고 말하는 바리는 내게 천사였고, 구원자였다.

난 다짐한다. 평생 당신을 위하며, 존중하며 살 거야.


고작 육아 이틀 차에 초보 엄마아빠는 지쳐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첫날보다 둘째 날이 나았고, 둘째 날보다 셋째 날이 나을 것이다. 우리의 경험은 하루하루 쌓여가고, 아이도 하루하루 커간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어갈 것이다. 엄마를 끔찍이 아껴주는 아빠와, 아빠를 더없이 존경하는 엄마, 우리가 중심이 된다면 우리 아가의 우주는 광활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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