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동물원

by 유스


빗소리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새벽녘 어슴프레 깬 잠결에 듣는 빗소리를 좋아한다.

고맙게도 오늘 새벽, 비가 내린다고 한다.


비가 내리면 떠오르는 잔상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날이 흐렸고 어두웠다. 그리고 쌀쌀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혼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이후 친구들과 떨어져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가족들은 바빴다. 늘 혼자였다. 나의 지구는 자전의 속도가 느렸다. 하루가 길었다. 넘치는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난, 아직 철부지 아이였다.


그날 동물원에 간 건 순전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동물원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에.

슈퍼에 들려 500원짜리 과자 에이스를 하나 샀다. 그리고 동물원으로 가는 165번 버스를 탔다. 종점이었다.

그날 날 바라보던 두 번의 시선을 기억한다. 비 오는 날 종점인 동물원에서 내리는 나를 백미러로 슬쩍 쳐다보던 버스기사 아저씨와 동물원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어주던 아저씨의 시선. 잘못한 것은 없지만 어린 나는 살짝 부끄러웠던 것 같다.



'비 오는 날, 난 동물원에 있다.'


별 것 아닌 사실이 설레게 했다. 내 심장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발 딛고 있는 세상은 고요했다.

비를 뚫고 동물원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사람을 맞이하는 동물도 없었다. 그날 동물원엔 나와 빗소리뿐이었다. 오직 우리 둘.

그날 나는 그리 크지 않은 지역의 동물원을 한 시간 가량 돌아다녔던 것 같다. 볼것도 없고 할것도 없었지만 그저, 좋았다. 그 공간이 마치 나의 것이 된 것만 같아서. 나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아서.


비는 신비롭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비 내리기 전 은근하게 풍기는 흙냄새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가끔 비 오는 날 아침이면 회사를 확 재끼는, 일탈을 꿈꾸게 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란다 너머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마냥 보고 싶다. 혹은 뜨거운 커피 한잔 쥐고 동물원에 가는 상상.


어렸을 적 언젠가는 창밖의 빗줄기가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보였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오선지의 악보처럼 아름다운 선율로 다가온다. 세월이 흐른 만큼 나의 마음도 단단해진 모양이다. 그래서 비는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마치 내가 성장한 것처럼 느껴져서.

언젠가 비 내리는 동물원에 한번 더 가보고 싶다.

어렸던 내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다. 만나면 말해줘야지.
넌 잘 크고 있어. 아무 걱정하지마. 충분히 지금도 행복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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