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꼭 가볼 요량이었다. 언젠가 가야지, 하고 몇 년을 미뤘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몇 번 바뀌었고, 별일 아닌 척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 정말 별일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곳은 이미 사라졌을지 모른다. 아니, 당연히 변했겠지. 그래도 오늘은 꼭 가보고 싶었다. 어쩌면 목련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랜드마크인 청수탕이 보일 때쯤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유리 516번지. 그때 대문 옆에는 초록색 우편함이 있었다. 매일 아침 신문이 꽂혀 있었고, 가끔 아버지 앞으로 온 고지서도 거기에 끼워진 채 있었다. 초인종도 있었다. 벨을 누르면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렸다. 인터폰을 들지 않으면 벨소리는 세 번 정도 반복해서 울렸던 것 같다. 누가 왔을까 궁금할 때도, 대답하기 싫을 때도, 나는 그 짧은 선율을 듣는 동안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집은 마당이 넓어서 좋았다. 여름에는 마당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수박을 먹었다. 씨를 뱉으면 까만 점들이 흩어졌다. 비가 오면 작은 웅덩이가 생겼고, 비가 그치면 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신발을 벗고 뛰어다니다 보면 발바닥이 축축해졌다. 엄마는 현관 앞에서 발을 털고 들어오라 했지만, 우리는 슬리퍼 바닥으로 남은 흙을 문지르고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차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초입에 있던 럭키슈퍼는 CU로 바뀌었다. 가게 입구, 누렇게 때가 묻은 유리 진열장에서 줄 맞추던 쫀드기와 쥐포는 자취를 감췄다. 대신 커다란 냉장고 여러 대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를 빨아들이며, 고요한 골목을 향해 웅웅거렸다.
슈퍼 옆 쌀집은 사라졌다. 쌀집 주인은 통장 아저씨였다. 각진 턱에 얼굴이 검게 그을린 아저씨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늘 반소매 러닝셔츠를 입었다. 주로 커다란 쌀포대 옆에 앉아 있거나, 저울에 작은 봉지를 올려놓고 가늘게 뜬 눈으로 무게를 재고 있었다. 배달이 없을 땐 가게 앞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올라가다 번번이 지붕 밑에 걸렸다. 늘 바빠 보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골목을 오래 지켜보던 사람이었다. 그때 통장 아저씨는 몇 살이었을까? 아직 살아계실까?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까?
대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누가 오해라도 할까 싶어 가만가만 문틈을 들여다봤다. 현관 앞의 목련나무는 여전했다. 봄이면 하얀 꽃잎들이 마당을 덮었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목련나무 앞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해마다 조금씩 자라는 내 키만큼, 목련나무도 자랐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대문에 눈을 붙이고 서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공간. 입술을 달싹였다. “모두 잘 지내고 있니?” 너무나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