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뭇 의연한.

2025년 5월 2일

by 에이해브

나는 얼마나 살게 될까. 우리가 가진 생물학적 한계에 다다르고 세상을 떠나는 이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어떤 불쌍한 영혼들은 그들의 성장이 채 끝나기도 전 시들기도 하며, 누군가는 자격 없는 천수를 누리다 편안히 눈을 감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인생도 절대적으로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다. 시간은 상대적이기에 삶의 길이 역시 필연적으로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대부분의 순간은 기억 속에서 그저 사라져 버린다고. 기억은 휘발성이다. 전날 밤 대차게 온 비에 생긴 물웅덩이도 날씨만 개인다면 전날의 달이 다시 뜨기도 전 다 말라버리기 마련이다. 기억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다. 우리는 개중 강렬한 것들만을 남긴다. 그대는 고작 일주일 전 아침으로 뭘 먹었는지 떠올릴 수 있는가? 대부분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몇년, 혹은 몇십년 전 그대의 손을 따스하게 포개주었던 누군가의 손길은 아직까지도 기억할 것이다. 그 날의 습도, 그 손의 체온, 혹은 그 손톱의 거스러미까지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리만치 모두가 의연했다. 그저 연이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지만, 감성과 긴 시간으로 점철된 인생 속에서는 그런 강력한 고리마저도 끊어질 수 있다. 외할아버지와 그의 친척들이 그랬다.


장례식은 열리지 않았다. 빈소 또한 열리지 않았다. 그저 발인만을 기다리며 행정 절차는 밟고 있던 우리 가족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외식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아무 일도 없던 것 처럼 담소를 나눴고, 위화감은 커녕 우리가 왜 여기서 이렇게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마저 까먹은 것 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분을 살면서 총 세 번 뵈었다.


처음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어렸을 때 보았다, 라는 얘기를 부모님께 들어 왔고, 더 이상은 알 필요가 없다고도 들었다. 두 번째는 불과 3주 전이었다. 그분은 침대에 누워 계셨다. 사뭇 충격이었던 이유는, 내가 본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빛바랜 사진 속 강인한 어부였기 때문이었다. 필명인 에이해브가 연상되는 인상이었다. 강렬한 동해바다의 햇살에 평생 지져저온 살갗과 그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당당한 표정, 모비 딕 쯤은 우습게 잡아올렸을 것만 같던 두꺼운 팔뚝까지. 그러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아흔 살의 노인은 사진 속 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분은 20년 만에 본 손자의 손을 잡고 힘겹게 눌러붙은 입술을 뗐다. 혀의 근육마저도 힘을 잃어 목구멍의 목젖이 쉽게 보일 정도였다. 나는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한 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그의 삶에서 얻은 교훈 따위를 가르쳐 주려고 했다, 와 같은 거창한 이유보다는 보다 단순하고 애처로운 이유 때문이었다. 발음이 심각하리만치 뭉개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두번째 만남 이후로, 그분은 그 침대 위에서 남은 여생의 몇 주를 보내셨다. 거동은 할 수 없었겠지만 생각만큼은 또렷하셨었으리라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날 그분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사고하고 계셨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분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몇 주 동안 병원 창 밖을 보며 떠올렸으실 그분의 기억과 감정들이다.


후회였을까, 만족이었을까, 혹은 공포였을까. 누군가는 지겹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90년의 긴 시간 동안 외할아버지를 스쳐지나갔던 강렬한 기억들은 말 그대로 주마등으로서 그분의 마지막 몇 주간 상영되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될까? 혹은 그럴 여유가 있는 죽음을 맞이하기나 할까?


작가의 이전글상호작용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