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4일
갓 스무살이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받은 첫 월급으로 한 건 옷을 사는 거였다. 내 또래 친구들이 많이 이용하는 쇼핑몰에서, 랭킹 상위권에 있는 옷들을 보이는 대로 주문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패션의 역사는 몇 년간 같은 추세였다. 패션 유튜브를 본 뒤 추천받은 옷들, 친구들이 유행이라며 알려준 옷들, 줏대 없는 옷들이 그렇게 옷장에 쌓여갔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본 멋진 인플루엔서들 처럼 되고 싶었다고 지금은 얘기할 수 있다. 나도 길거리에서 보이는 힙한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했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구매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기저가 되는 이러한 행동양식은 단순히 쇼핑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서, 당시 일하던 피시방이 집 주변이었던 관계로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많이 찾아왔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학창시절 소위 '좀 노는 애들' 로 보여지던 친구들이었다. 항상 게임 한 판이 끝날 때 마다 그 친구들은 흡연실로 향해 담배를 뻑뻑 피워댔고, 밝히기 부끄럽지만 내 눈엔 그들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담배에 손을 댔다. 내가 그들을 보았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눈에 그렇게 보여지길 원하면서. 담배를 피면서 괜시리 폼을 잡아보기도 하고, 남들이 안 피는 담배만 일부러 골라 피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나도 어른스럽고, 멋있어 보이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유행하는 옷을 사는 것, 담배를 피는 것은 사악한 것이 아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척' 과도 전혀 관계가 없고.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된 모방의 시도다. 남들처럼 보이려 같은 자켓을 사고, 남자답게 보이려 담배를 피는 건 분명히 건강하지 않다.
지금껏 써왔던 글들도 그렇다. 내 감정에 솔직한 글쓰기가 아닌, 허세와 가식만 가득 찬, 타인의 관심을 어떻게든 긁어모으려 발악해왔던 일종의 작가 행세만 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려지 않으려 한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작문이란 내 생각을 정리하고 소란스러운 머릿속을 가라앉히려 하는 명상의 일종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글쓰기에 대한 발상의 전환은 내 쇼핑의 방향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2년쯤 교제해오고 있는 지금의 여자친구와 나의 성향은 퍼즐의 양단 끝 조각들과도 같다. 설령 퍼즐이 완성되더라도 서로 먼 지점에 있어 그 어떤 색도 공유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여자친구의 색깔에 나를 맞추고 싶었다. 내 성격은 물론이고, 외적인 면으로도 그녀의 취향에 내가 맞았으면 했다. 힙한 옷을 골라 사고, 유행하는 구도로 사진도 찍어 보고. 물론 2년의 다분한 노력 끝에 원하는 걸 얻었냐 하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내 머리속의 작은 변화 후, 나는 내가 사고 싶었던 자켓을 샀다. 여자친구는 할아버지 옷이라고 하지만 뭐, 내 옷인데.
오늘 '더 웨일' 을 봤다. 보고싶은 영화 리스트에 넣어놓은지 꽤 되었는데, 예고편에서 본 브랜든 프레이저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간단히 플롯을 정리해보자면, 동성과 바람이 나 8살 난 딸과 아내를 버리고 떠난 남자의 며칠간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의 동성 연인은 모종의 사고로 죽은 지 한참이며 그 사고의 여파로 그는 200kg이 넘는 거구가 되어 혼자서는 거동도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렇기에 온라인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그는 영화 내내 소설 '모비 딕'에 대해 쓰여진 에세이를 계속 혼자 읊는다 : "이 해적 선장은 한 고래를 복수심에 불타 계속 쫓고 있지만, 이는 불쌍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이 고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선장은 이 고래만 잡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역겹다. 요리를 할 수도 없어 항상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다리는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휠체어나 보조 기구가 없으면 움직일 수도 없다. 얇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이 그의 머리 위에서 나풀거리고, 숨소리는 너무나도 거칠어 보는 나의 신경까지도 거슬리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주변인들에게 계속 묻는다. "제가 역겹나요?". 이 질문에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한 사람은 그의 집에 계속 찾아왔던 선교사 청년 토마스였다. 사이비 교회의 선교사인 그는 역겨운 몸뚱아리에 갇혀 있는 주인공 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집을 몇 번이고 방문한다. 그랬던 그가 찰리의 면전에 역겹다고 말한 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찰리는 어땠을까. 내 눈에 그는 해방된 것 처럼 보였다. 선교사 토마스가 드디어 그의 감정에 솔직해졌기 때문이었다. 찰리는 그의 강좌의 학생들에게도, 에세이를 도와달라는 딸에게도 항상 그들에게 솔직하라고 말했다. 이 강의도, 글쓰기도, 대학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며, 오직 솔직해지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해왔다. 이는 영화의 단편적인 부분에 해당하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와닿았다. 나는 솔직한가? 최소한 나 자신에게도 솔직한가? 나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
이렇게 시작된 질문들은 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남들에게 인상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나를 맞춰오고, 마치 그게 진짜 내 정체성인 것처럼 나를 속여왔다는 건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저 타인이 내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나에 대한 생각이 혹여나 부정적으로 바뀌지는 않을까, 하였기에 내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겁이 나 마음속에 욱여넣고, 결국 그것들은 응어리져 종양으로 남는다. 그 누구도 내게 이리 하게끔 강요하지 않았다는걸 생각하면 상당히 어리석인 짓이다. 물론 나를 평가할 순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내 정체성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내가 어떻게 입을지, 내가 어떤 말을 할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내가 누군지는 온전히 내가 결정하는 것이며, 타인의 시선이 나에게 작용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