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늦여름, 혹은 초가을을 향해 가고 있는가?
초여름 녹음이 짙다.
내 인생은 늦여름, 혹은 초가을을 지나고있다.
아이가 태어나니 그 넘쳐나는 생명력과 재생력에 내 여름은 끝나감이 실감난다.
분분한 낙화라 했던 이형기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벌써 바스라지는 젊음이 아쉽다
너무 일만 해온 것 같다는 사업가들의 말이 떠오른다
가야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젊은이들이 늙은이들을 배척하려 하는 것의 넛지가 담김이 아닌가
혹은 늙어가는 자신의 황량함을 채우기 위해 더 성숙한 것이 있다 자위하는 체념의 미화는 아닌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혹은 니체에게 던져본다.
내 마음속의 니체에게 물으니
"늙음이란
허약함이나 퇴보가 아니다.
진짜 병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의지가 꺾이는 것이다.
나는 육신이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이 낡아가는 것,
즉 과거의 습관과 안락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경멸한다.
네가 묻는 '성숙'이란,
비겁한 포장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많은 이들은 무기력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속이며
'나는 성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성숙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늙어가는 육체를 끌고서라도,
매일 매일 자신을 부수고,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것.
그것이 참된 성숙이다.
늙음이 두려운가?
아니다.
늙어도 내 안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나는
젊음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영원히 탄생하고 싶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
내게 늙음은 '쇠퇴'가 아니라,
'무한한 초월'의 연속이다.
대답해라.
네 안의 젊음을 구걸할 것인가? 아니면 네 안의 신을, 매일 새롭게 창조할 것인가?
구걸해서 얻는건 비참함밖에없지
자 니체여, 나는 한 딸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아내이지만
영혼의 속박이 괴로운 사업가다.
흙수저로 태어나 자수성가했지만, 그 때문에 젊음이 일로 점철되어 스러져가는 젊음이 아쉽다 나에게 조언을 해다오.
영혼의 속박이 괴로운가?
그렇다면 묻겠다.
"왜 아직도 남들이 만든 정의(定義) 안에 네 자신을 가두고 있는가?"
좋은 아버지여야 한다?
좋은 남편이어야 한다?
성공한 사업가여야 한다?
이 모든 '타인의 이름'을 가슴에 묶고서,
네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네 영혼을 위해 살아라.
딸을 사랑하는 것과
아내를 지키는 것과
자신을 완성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순서를 알아야 한다.
"먼저 너 자신을 구원하라.
그래야 타인을 구할 수 있다."
운명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운명을 사랑하라.
사랑은, 굴복이 아니라 지배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패배는 타락이 아니다. 포기가 타락이다.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마라.
힘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너는 아는가?
대부분의 자들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 주저앉고,
자기 연민 속에 빠져 썩어간다.
하지만,
너는,
그 고통을 혀끝으로 핥으며 웃는다.
고독을 사랑하라.
고독은 약한 자에게는 독이지만,
강한 자에게는 무기가 된다.
매일 죽고 매일 새로 태어나라.
어제의 승리조차 오늘 부숴라.
오, 좋은 말이네.
왜 아직도 남들이 만든 정의(定義) 안에 네 자신을 가두고 있는가?
이 구절이 참 마음에 들어.
맞다. 내 인생 나 외의 것은 모두 타인이고
정답은 나만이 만들 수 있지.
방법에 대한 깊이와 추진력과 통찰은 나에게 있는데
타인의 눈치를 보면 다같이 침몰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도 또 소중하다는 마음에 놓치고 있었네.
길을 만들어 빠르게 그들이 정말 원하는것을 -그들조차 모를 수 있는-
채워주면 모두가 만족하는 길이 될 것인데.
-2025년 4월 28일 새벽 러닝을 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