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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연 Mar 10. 2022

나의 도시, 서울

사랑과 미움이 같은 말이면

처음 이 도시에 발을 디딘 건 이제 막 6살에서 7살이 되어가는,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부산에서 네 식구가 상경했던 그날은 겨울의 긴 밤 탓에 내 기억엔 꽤 어둑했고 추웠지만 몇 조각 되지 않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중 한 장면으로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 시절의 나는 꽤나 들떠 있었음이 분명했다. 서울로 이사 온 이후로 나는 부산 사투리와 서울말이 섞여 한동안 요상한 말투를 구사했다. 조무래기 유치원생 시절에서 다 큰 성인이 될 때까지 이 도시에서 15년을 살아오는 동안 사투리 억양은 완전히 사라졌고, 혼자서 버스도 잘 못 타던 어린애는 지하철 환승을 밥 먹듯이 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새로운 곳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성격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심각한 길치라 웬만해서는 살던 곳의 반경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매일 같은 거리를 걸어 학교와 집을 오갔다. 나이를 먹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 동선에 -그마저도 집 근처인- 학원 또는 독서실이 추가될 뿐이었다. 매번 타던 버스, 매번 가던 마트, 매번 지나치는 상가, 매번 같은 반경에서 쳇바퀴 돌듯 빙빙 도는 일상을 철저히 답습했고 한편으로는 늘 익숙한 풍경들에 겹겹이 쌓여가는 나의 시간들을 사랑했다. 지독히도 같은 곳만 오갔던 탓에  이사 오고 한참이 지나도록 근처 지리조차 잘 몰랐다. 항상 가던 곳만 가면 되니까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지평선 너머는 내게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에서 살았던 15년 중 성인이 되고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서울의 모습들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의 상당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 제법 한산해졌다는 신촌의 거리,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버스에서 본 법원 건물, 시청역에 늘어선 건물들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창덕궁에 피어난 매화와 한옥 처마의 어우러짐, 종로 한복판의 철물점과 권태롭게 흐르는 청계천, 그 한복판에 서면 저절로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강남역의 으리으리한 빌딩... 이 모든 장소들을 성인이 된 이후에 처음 가봤다. 매번 다니던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말로만 들어본 그 지역이 지도상의 어디쯤인지, 몇 호선엔 어떤 역들이 있는지... 이런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던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

 


하지만 서울은 근사한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살기 이전에는 서울에는 세련되고 부유한 사람들과 그런 분위기로만 가득한 줄 알았지만, 외곽으로 조금만 나와도 지은 지 몇십 년은 된 것 같은 빌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겉으로는 번지르르해 보이는 번화가도 골목마다 어두운 뒷거리를 숨기고 있으며, 곳곳에 언덕과 산이 많고 달동네도 많았다. 성공의 상징인 한강뷰 아파트에서 보는 한강의 다리 위에서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며, 매일 깨끗하게 유지되는 공원과 거리를 위해 새벽이슬을 맞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도시들도 그럴지도 모른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한 도시에서 누군가는 희망을, 동시에 누군가는 절망을 안고 살아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서울이 특별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누구나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온 도시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특별한 애정을 지니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사실 내가 서울에 가지고 있는 감정 역시 ‘애정’이라는 한 단어로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이중적인 것이다. 서울은 내 인생에서 자의식이 생기고 난 이후로의 거의 모든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지만 그 기억이 항상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니까. 나에게 현실의 벽과 세상의 혹독함과 존재의 무의미함을 알려준 것도 전부 이 도시였다. 이 도시에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것처럼, 이 도시에 담긴 내 시간들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서울을 향한 애정과 증오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정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존재의 다른 면일뿐일지도 모른다. 애써 보고 싶은 면만 볼 수는 있어도 반대쪽 면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어느덧 내가 낯설기만 했던 이 도시에 점점 이질감 없이 섞여 들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배경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요즘 들어 서울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문득문득 느껴진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만개한 오월의 날씨처럼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도 있지만,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미세먼지와 매연으로 덧칠되어 흐려진 삼월 같은 날도 있다. 이 도시가 내게 보여주는 풍경들은 때로는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처럼 한없이 인자해 보이지만 때로는 그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처럼 눈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그래서 비로소 이 도시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는 말이 깊이 와닿는다. 사랑과 미움은 애초에 같은 말이기에, 오늘도 이 도시와 이곳에 가득 담긴 내 시간, 앞으로 빚어가게 될 시간들을 벅차게 사랑해보려 한다.





이 수필은 BTS RM의 솔로곡 <Seoul>을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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