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머리 파마가 무척 잘 어울리는 손님이 비옷을 입고 가게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옷을 개더니 망설임 없이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보통은 나한테서 먼 자리에 앉거나 등을 돌리는 자리에 앉기에 그 망설임 없음이 그녀에 대한 첫 정보였다. 타인과 눈을 맞추는 게 힘들지 않다는...
주문한 음식이 나가고 언제나처럼 내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열흘 정도 시골살이 하러 왔다고 했다. 군에서 지역 홍보와 젊은 층 유입을 위해 시골 살아보기 사업을 하고 거기 뽑혀 이곳에 머물게 됐다고 했다. 며칠 머물며 차도 많이 마시고 여행자의 특혜, '환대'를 받아 참 좋았다고 했다. 더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다른 손님이 들어왔고 끝맺지 못한 말들이 빗방울처럼 공중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며 말했다. "다음 주에 여기 근처 숙소에 머무르니 그때 한 번 더 올게요."
바쁜 주말을 보내고 진짜로 한가하던 평일. 그녀가 다시 왔다.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가 음식을 먹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얘기가 무척 잘 통했다. 파동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거기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는데, 시골에 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고 했다. 지금은 살고 싶은 시골을 찾아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공주가 가장 좋았다고 했다. 나는 가보지 못한 공주가 궁금해 그곳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백제의 유산인 왕릉이 있고, 높은 건물이 없고, 관광지화 되지 않은 옛 경주 같아서 좋았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언젠가 공주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자고 내가 제안했다. 수다로 마른 목을 축이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저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에요. 몇 년 전 우울증에 빠졌었어요. 큰 계기나 이유는 없었는데 계속 심해졌어요. 살 의욕도 없고, 무기력하고. 정신과 상담도 받고 조제받은 약도 계속 먹었어요. 제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좋아해 영화 관련 이야기도 쓰고.. 여러 분야에 재주가 좀 있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너 잘하는 거 많잖아. 너 재주 많은데 왜 그래. 그거 더 열심히 해 봐.' 아무리 좋게 얘기해 주고 의지를 불어넣어 주려 애써도 그런 말이 하나도 위로가 안 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그러다... 어찌어찌 그 시간을 통과해 조금씩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뒤돌아보니 살아있는 제 자신이 너무 대단한 거예요. 살아있어 주어 너무 고마운 거예요. 그 늪에서 빠져나와, 그전보다 훨씬 삶에 감사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젠 하루하루 재밌게 살아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에요."
그녀의 말 끝에 왈칵 눈물이 났다. 눈이 빨개진 채 나는 잠깐 침묵했다. 나도 너무나 잘 아는 그 세계를 그녀가 겪었고 또 잘 헤쳐 나왔다는 게 너무나 고맙고 예뻤다. 내가 길 위를 헤매며 많은 사람을 붙잡고 묻고 또 묻고... 오열하고... 나 자신의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가 알아낸 '나라는 존재의 고마움'에 대해 어린 나이의 그녀가 길로 떠나지 않고도 찾아냈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진짜 존경스러웠다.
그 얘기를 주고받던 시간은 몇 분이었을 거다. 하지만 마음의 시간은 우주가 팽창해 알을 하나 낳고 알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와 나의 우울이 섞이고 확대되고 폭발해 새싹이 돋아나는 그 모든 과정이 우리가 함께 있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었다. 살아있어 주어 고맙다고 그녀에게 고개 숙였다.
몇 시간의 대화로 맥주와 커피도 끝나고 그녀도 떠났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자리에서 잘 살아주길 응원하며...
나는 혼자 남아, 무덤 같던 내 청춘 속으로 뚜벅뚜벅... 다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