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꽃이 전한 말

by 문경화

포르투갈 까미노를 걷던 날이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양말 세 켤레 중 한 개는 구멍이 많이 나서 버리고 두 켤레를 번갈아 신던 때. 또 새로운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나온 새끼발가락이 신발에 부딪혀 매우 아팠다. 절뚝이며 걷다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양말을 깁기 시작했다. 분명 근처에 집도 몇 채 있고 시멘트 도로도 놓인 길이었는데 양말을 깁는 동안 사람 한 명,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좋아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바람을 느꼈다. 개미가 올라와 발등에서 해찰하다 사라지는 동안 나무에 기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새싹을 밀어 올리고 푸르러지고 열매 맺는 건 그 일이 즐겁기 때문이지. 강한 비바람과 태양도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진 못하지.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들이 그늘에서 쉬다 가고 열매 먹는 모습을 볼 때 난 행복해. 가진 것을 나누기 때문이지.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결국 썩기 마련이야. 물론 썩어 거름이 되겠지만 나누는 것만큼 기쁨이 크진 않아. 가끔 사람들이 우악스럽게 내 팔을 부러뜨려 놓고 가. 오늘도 한 사람이 내 팔을 꺾더니 그 자리에 버리고 가더군.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듣지 못하는 것 같았어. 그럴 때 좀 슬프긴 하지... 하지만 나도 여러 방식으로 여행한단다. 새들이나 바람에게서 소식을 듣기도 하고, 너처럼 여행자가 찾아오기도 하고... 넌 어때? 네 얘길 들려줘.'


나무의 부러진 부분이 아직도 축축했다. 그 부분을 손으로 잡자 어떤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초록 눈물이 뚝뚝 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때 그 대화를 엿듣던 엉겅퀴가 말을 꺼냈다. '난 아름답기 위해, 예뻐 보이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나의 소명이었지. 내 엄마가 씨앗을 퍼트렸고 나는 꽃 피는 운명이었던 거야. 물론 예뻐 보이려 노력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겐 내가 예뻐 보이겠지.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신기해. 끝도 없이 예뻐 보이려 한다며? 인정받으려 스스로 자학하고 비교한다며? 존재하는 건 그 자체가 아름다운 건데 왜 그러는 거니? 넌 어때? 넌 어때?'


쿵... 쿵... 심장이 떨려왔다. 너무나 아름다운 말들이 감각의 더듬이로 들렸다. 거의 세 달째 걷고 모든 감각이 순수해진 상태라 자연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환상이나 환청이 아니었다. '넌 어때? 넌 어때?' 꽃과 나무에게 내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무는 이해한다는 듯 차르르 차르르 자신의 잎사귀를 흔들었고, 꽃은 내 생각이 잘못됐다며 좌우로 몸을 크게 흔들었다. 개미도 다시 맨발로 올라와 해찰하지 않고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심판관처럼 듣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나눌 때 자신도 마르지 않는다는 걸, 아니 오히려 채워진다는 걸 나무는 말해주었다. 그냥 살아있는 것 자체가 예쁜 거라고 꽃은 말해주었다. 자신이 가진 게 무엇이든 그걸 나누는 게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이라고 말해주었다.


스물다섯, 처음 인도로 떠나기 전 나는 충전과 방전을 반복했다. 산책과 독서와 침묵으로 충전했다가 사람들과의 수다와 술자리, 쇼핑으로 방전했다. 혼자 있을 땐 충전됐지만 금방 외로웠고,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면 늘 방전됐다. 갈증이 느껴졌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내가 휴대폰도 아니고 왜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는 건지, 어디에 충전기를 꽂아야 방전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건지.... 길바닥에 드러누워 생떼를 써서라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나무와 엉겅퀴는 말했다. 진실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라고... 그래야 죽은 채로 살지 않을 수 있다고... 가진 것을 나눌 때에만 방전되지 않을 수 있다고...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 나는 이야기. 나는 도로에 고요히 앉아 내가 나눌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마르지 않는 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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