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사나(Vipassana) 명상.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엔 일어나지 않겠다는 대결정심으로 보리수나무 아래 앉았을 때 이 비파사나를 하셨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고엔까라는 재가 수행자께서 이 명상법을 널리 알리셨다.
내가 비파사나 명상을 처음 시작한 곳은 이가뿌리라는 뭄바이 근처 소도시에서였다. 그곳은 인도 비파사나 센터의 본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명상을 체험하려면 이메일이나 전화로 예약신청을 하고 날짜를 잡아야 한다. 게다가 신청인이 많아 대기해야 할 때도 많은 곳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무작정 오토릭샤를 잡아타고 밤 8시에 이가뿌리 센터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 영어도 짧은 동양 여행자가 무턱대고 명상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자원봉사자들은 황당해했다. 윗분들께 물어보겠다고 기다리라 했다. 나는 나무 아래 앉아 운동화 코만 쳐다봤다. 용케 허락이 떨어졌다. 그날이 10일 코스의 첫째 날이었고, 한국분이 세 분이나 계셨고, 그 코스에는 특별히 한국어 통역 역할을 해 주시는 분도 계셔서 허락해 주셨던 것 같다.
10일 코스 중 9일 동안 침묵하며 하루 종일 좌선과 법문 듣는 일이 일과인 비파사나 센터. 이가뿌리 센터에서의 날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다. 이가뿌리 센터 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밥을 산처럼 쌓아서 먹었다. 명상을 위해 짜이나 바나나 하나로 몸을 비우는 다른 수행자들 사이에서 심지어 두 번씩도 가져다 먹었다. (뷔페에 온 줄...) 그렇게 많이 먹으니 좌선한다고 앉아있으면 하루 내 트림이 나오고 잠이 쏟아졌다. 하루 종일 졸다 깨다를 반복했고 깨어있을 땐 생각만 쫓아다녔다. 저녁에는 한국어로 통역된 고엔까의 법문 테이프를 듣고 한 시간가량 더 좌선한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밤 9시 반쯤 돼야 하루 일과가 끝난다. 하루 종일 앉아 아픈 다리를 터덜터덜 끌고 숙소로 돌아오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말만 안 할 뿐 머릿속으로는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고, 먹고 자고를 무한반복했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다고? 도대체 어쩌다 명상이란 걸 하려고 했는지 화가 났다. 명상이란 게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슬펐다.
그렇게 10일 코스가 끝나고 한국분들과 함께 뭄바이로 갔다. 며칠 만에 대도시에 나가 새소리, 사람소리, 경적소리, 헝클어진 세속의 소리를 들으니 자유를 느꼈다. '명상은 내게 안 맞나 봐 여행하며 다른 걸 찾아봐야겠어.' 그때 이가뿌리 센터에서 통역을 맡아 주셨던 분이 다람살라에 달라이 라마를 뵈러 같이 가자고 하셨다. 본인이 통역을 맡을 거라 달라이 라마를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나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다. 살면서 다시없을 기회였는데... 거절했다.
'역시 여행이야!' 하며 마구마구 남인도를 쏘다녔다.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영어공부를 하고 춤과 그림을 보고 북인도와 다른 남인도의 여유와 부유함을 즐겼다. 우리가 '인도'를 떠올릴 때 갖게 되는 거의 모든 이미지들은 북인도 쪽 문화였고 남인도는 무척 다른 분위기였다. 해먹에서 늘어지게 자는 오후의 낮잠 같던 남인도 여행.
그런데 몇 달 뒤... 마음을 뒤집고 인도 북부 리시케시 근처 데헤라 둔 센터에서 비파사나 명상을 다시 시작했다. 떠돌아다니는 여행은 분명 재미있고 배울 것이 많지만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여행이 필요하다고 마음이 채근했다. 소박하고 맛없었던 데헤라 둔 센터 식사 덕분이었는지, 나도 이제 짜이 한 잔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몇 시간씩 호흡과 몸을 관찰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봤다.
처음 삼 일간은 코 밑에 삼각형 이미지를 만들어 들숨과 날숨을 관찰했다. 생각이 나를 끌고 갈 때마다 그 삼각형으로 돌아오려 노력했다. 그리고 사일째부터 그 감각을 온몸으로 확대시켰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신경 하나하나, 감각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고엔까의 법문,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는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좌선하고 앉아있으면 생각은 너무나 쉽게 파고들어 한국음식으로 갔다가 남자로 갔다가 과거 상처로 갔다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갔지만, 몸으로 돌아와 다리가 저린 것을 알아채고 모기 문 자리가 가렵다는 걸 알아챘다. 고통이 느껴져도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계속 지켜보면 잠시 뒤 그 감각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했다. 셀이라고 부르는 혼자 들어가 수행하는 동굴에서도 자지 않고 관찰했다. 새벽 네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밥 먹고 빨래하고 산책하는 거 외엔 자리에 앉아 집중했다. 가끔은 환희에 차올랐고 가끔은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고 가끔은 내가 비관적이었던 이유가 이해됐다. 그 또한 지나갔지만 고요히 나를 관찰하는 게 재미있었다.
하루는 어떤 영상이 보였다, 명료하게! 눈을 감고 좌선하고 앉아있는 내 몸에 쇠사슬이 칭칭 동여매져 있고 그 끝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는데 왼손바닥 위에 열쇠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결국... 나를 묶은 것도 나를 풀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뜻 같았다.
이가뿌리의 결심을 깨고 세 번 더 비파사나 명상 열흘 코스에 참석했다. 열흘째 되는 날은 세속으로 나가는 날이라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코스에서 열흘째 날도 혼자 셀에 가 좌선했다. 나중에 외국 친구들이 '졸지도 않고 꼿꼿한 네 뒷모습을 보며 좌절했다'라고 단체로 비난해 함께 웃었을 만큼 나름 집중했다. 하지만 침묵하며 너무 집중했던 나머지, 10일째 날 바로 대도시로 나가니 온몸이 전기충격기에 감전된 듯 격하게 떨려와 몹시 아팠던 기억이 선명하다.
인도에서 돌아와... 호흡에 집중하는 날은 줄어들고 다시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거나 생각과 감정의 업식대로 살게 되었다. 게다가 시를 쓴답시고 더 요란스레 감정대로 끌려 다녔다. 시는 모든 오물과 허물을 알아야 하는 거라며, 그 오물을 뚫고 나오는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열심히 방황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흔 넘어 명상으로 돌아왔다. 매일 자리에 앉거나 산책하며 호흡과 발바닥 감각을 알아채려 한다. 하지만 집중은 금방 깨지고 몇 초 뒤에 바로 생각이 끼어든다. 마치 생각의 노예 같은 종속의 삶이다. 이렇게까지 지배당하며 살았는데 몰랐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나는 일기에 썼다. '생각이 주인이라면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가끔 내 마음 밑바닥 하수구를 볼 때면 진절머리가 나 도망가고 싶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엉망인 줄 모르고 우월과 열등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대로 마주 보려 노력한다. 내가 인식하고 한계 지었던 것들, 판단을 내리고 결정지었던 이분법들, 사진처럼 표상으로 들어와 감정과 생각을 지배했던 외부의 정보들, 한시도 여기에 있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 걱정과 후회를 오가는 마음에게 여기에 있자고 요청한다.
나는 아직 초보수행자다. 내 앞에서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들을 '지켜보는 자'이자 그것에 '휘둘리는 자'이다. '참나'라고 부르는 존재를 인지하지만 여전히 에고의 부림대로 반응한 후 알아차릴 때가 많다.
하지만 돌아보면 여행을 통해 많이 변했다. 거기에 명상도 크게 한몫했고... 스물다섯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그냥 다른 인간 같다. 그때의 그 방황과 고민과 눈물을 생각하면... 애잔하고 쓸쓸하다. 스스로 설정해 놓은 한계 안에서 답답해하고 스스로를 소모하며 파멸 쪽으로 달려가던 스물다섯의 나. 손에 쥐고서 찾아 헤매며 나선원형을 달려던 나. 그에게 다가가 꼬옥 안아준다. '괜찮아. 방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열쇠를 쥐고도 평생 쇠사슬을 찬 채 남이나 세상 탓하지 않게 내가 구원해 볼게. 부정과 비관의 한계마저 벗어나볼게. 충분히 고민했으니 이젠 행동해 볼게. 그 많던 눈물로 이젠 타인을, 세상을 도와볼게. 우린 만날 수 있어. 나는 그때도 지금도 현재니까!'
자신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잠깐 지구에 왔다 사라지는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잠깐 반짝였다 꺼지면서도 계속 태어나는 이유.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찾은 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한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