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이 한잔

by 문경화

그녀로부터 메일이 왔다.


인도 델리의 한 인터넷 카페에서 그 메일을 읽은 후, 손을 덜덜 떨며 짐을 싸 스리나가르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좌석뿐 아니라 통로와 지붕 위에도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수다를 떨며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출발 예정 시간에 출발하지 않는 버스, 화내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들, 이방인을 훑어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 보자기 안에서 울어대는 닭과 양의 불안한 울음소리, 그에게 미쳐있던 나 자신.... 모든 게 다 싫었다. 나의 화가 버스를 폭발시켜 버릴 것만 같았다.


배낭을 끌어안은 채 버스에서 내렸다. 돈 아끼려고 항상 싼 밥 먹고 싼 대중교통만 이용하고 제일 허름한 숙소에서 자고... 그렇게나 아낀 돈을 그에게 쓰는 전화비로는 얼마나 펑펑 써댔던가! 그것도 매일매일... 더 이상 아끼지 말자는 생각에 훨씬 비싸고 편리한 지프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다섯 명의 현지 남자가 타고 있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태운 지프는 곧 출발했고,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너는 그의 문어발 중 하나였다고... 그는 동시에 대만, 일본, 독일, 한국 네 명의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였다고... 대만 여자인 자신이 실제 그의 여자친구이며 너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은 그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람이 들통나자 여자들이 자기에게 매달렸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 자기를 방해한 건 여자들이라고 했단다. 대만 여자는 말했다. 그가 끝내 선택한 건 자신이니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그에게서도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널 가장 사랑한다고, 널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끝까지 달콤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그. 델리의 한 인터넷 카페에서 그 두 남녀의 메일을 읽고 나자 속이 메스껍고 몸이 덜덜 떨렸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가 바람둥이라는 게 화났다. 그도 미웠고, 그녀도 미웠다. 그리고 거짓에 놀아난 나 자신이 가장 미웠다.


지프차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두 시간이나 울었다. 차 안에는 내 울음소리와 침묵만이 가득했다. 출발할 때는 자기들끼리 담소도 나누던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고 있었다. 동양 여성 여행자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통곡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불편했을까?


오래 울자 그것도 힘들었다. 담요 밖으로 나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원으로 뒤덮인 산, 그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양 떼와 소떼, 지붕 낮은 돌담집들, 히말라야 눈이 녹아 흐르는 녹색 빛 계곡물...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마음에 담지 않았다. 멍청히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몇 시간 뒤, 차가 간이휴게소에 멈췄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잠깐 화장실도 가고, 불편한 마음도 풀었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쳐다보니 운전기사가 짜이 한 잔을 내밀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짜이 한 잔... 그는 짜이를 주고 바로 뒤돌아서 갔다. 두 손으로 유리잔을 그러잡고 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눈을 맞추고 내 모든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금세 사랑을 속삭이고, 여행을 멈추고 그의 곁에 머물고 싶던 나를 더 가라고 너 자신을 더 여행하라고 밀어주고, 떠나와 길 위에서 매일 전화하고... 남자를 사귄 경험이 별로 없어 그가 잘해주자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모든 여자에게 친절했던 그가 나에게만 달콤하다고 오해했다. 타인의 애정,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내 욕망을 그는 알아봤고 그는 단지 그걸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그의 관심을 사랑한 거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미친 마음이었다고 마음이 말했다. 관심받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었다고 마음이 말했다. 처음 본 여자가 차 안에서 울고 있을 때 욕하지 않고 불편한 공기를 감내하며 침묵하는 것, 침묵으로 위로하는 것, 울고 난 이에게 따뜻한 짜이 한 잔을 내미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마음이 말했다. 내가 미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모든 진실이 보였을 것이다. 내 마음이 미쳐있었던 거였다. 그러니 그에게 화 낼 필요 없다고 마음이 말했다.


어디선가 운전기사가 나타나 유리컵을 달라고 창문을 두드렸다. 소리 내 말 걸지 않고 몸으로 말을 거는 사람, 참... 따뜻했다. 그의 침묵이 나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미친 사랑도 경험이야. 넌 여기서 배우고 성장할 거야. 울었으니 이제 괜찮아...' 따뜻한 짜이가 온몸에 온기를 주었다.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창밖만 보며 스리나가르까지 몇 시간을 더 달렸다. 도착해 배낭을 메고 차에서 내리자 운전기사도 따라 내렸다. 그는 아랍어로 축복의 만트라를 몇 마디 해 주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울림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맑고 동굴처럼 깊은, 까만 눈동자였다.

토요일 연재
이전 14화사랑이라는 이름의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