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영혼을 구원한다 2

by 문경화

인도여행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끔 벗고 나서 도와줬다면, 스페인 산티아고 길은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고 안아줬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대뜸 "언니가 '문'이죠?"라고 물어봐 깜짝 놀라게 했던 지영자매. 그녀들은 내가 알베르게 방명록에 남긴 글을 숙소마다 찾아 읽으며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며, 멀리서 걸어오는데 딱 '문'일 것 같았다고 진한 포옹을 했다. 몬테 델 고소라는 산티아고 바로 전 마을에서 만난 은지는 한참의 수다 끝에 "언니가 그 유명한 '문'이에요? 저기 게시판에 언니 이름 붙어 있는데 못 읽었어요? 만나는 외국 사람마다 언니 소식 물어봐 도대체 '문'이 누구야 했는데..."라고 폭소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쪽지는 슬로베니아에서 온 이보나가 남긴 것이었다. 이보나는 '넌 사랑을 아는 사람이야, 문. 꼭 연락하자.'라며 메일 주소와 허그를 남겼다.(내가 워낙 절뚝이며 걸어 외국 친구들이 한국사람에게 내 안부를 물었던 거였다.) 피니스테레 가는 길에 만난 독일 할아버지 볼프강은 70이란 나이에 나에게 사랑에 빠졌다며 나를 엔젤이라고 불렀다. 또 길에서 만난 한국사람 중 언니가 가장 좋았다며 선물을 준 부정이, 프랑스인 조수아는 성당에서 나 혼자만 관객으로 두고 성가를 메들리로 불러주고 안아줘 나를 펑펑 울게 만들었다. 수녀였다가 환속해 처음으로 여행길에 나선 용선 언니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문경화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길에서 느닷없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원연순 언니는 60이 넘은 나이에 너랑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서울 가면 커피 기계 사놓을 테니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일본에서 온 메구미는 밥을 사주며 네게 배우는 게 많다고 말하며 나를 포옹했다. 테레사 언니는 내게 '넌 몸도 마음도 예쁘고 씩씩한 아이'라고 말하며 길에서 진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 에스뜨레야는 내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기까지 5년이란 시간 동안 메일을 보내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 때문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뭘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그런데 사실 나야말로 놀랍다. 어쩌다 갑자기 이런 사랑을 받게 된 걸까? 평상시에 없던 매력이 길 위에서만 생겼나?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히 눈에 띄는 점도 없으며 타인과 금방 친해지는 편도 아닌데... 그리고 지난번에 얘기했듯, 한 번도 애정 표현을 못 받고 자랐고 심지어 스물다섯까지 나를 안아준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이건 그냥 길의 마법이었다고... 순간의 모습만 채집하는 여행자에게 그 순간이 전부이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일상에서 매일 만났다면 별로이고 진부하게 느껴질 일도 그게 여행이라서, 순간 반짝였다고... 또 대부분 여행자는 길 위에서 열린 마음이고 사랑과 행복과 교감능력이 넘쳐흐르는데 그때 마침 눈앞에 내가 있었던 거라고... 그러니 어쩌면 내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 길에서 유성처럼 쏟아지며 반짝였던 사랑은 순간이었지만 나를 변화시켰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짧은 반짝임들이 모여 나의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했던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게 된 건 다 여행 덕분이다. 늘 침묵하고 뒤에 숨어 의견을 내지 않던 내가 행동하게 된 것도 여행 덕분이다. 무기력했던 내가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살고 싶어 하고, 남을 돕고 싶어 하는 것도... 다 여행 덕분이다. 나는 여행으로 구원됐다. 신이 아니라 길의 마법으로 구원됐다.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떠난 길에서 아이러니하게 삶을 만나, 살게 되었다.


어쩌면 혼자 울고 있을 당신... 방황하느라 자신을 해치고 있을지도 모를 당신... 세상의 잣대나 기대와 다른 현재 자기 모습 때문에 좌절에 빠진 당신... 우울에 빠져 무기력한 당신...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나만 빼고 좋아 보여 슬픈 당신... 너무너무 외로운데 누구 하나 손 내밀 이 없는 당신에게...


나의 여행을 보내고 싶다. 내가 받은 그 많은 생의 에너지를 당신께 드리고 싶다. 얼굴 모르는 당신께 가 닿을 수 없어 여기 글을 부려놓지만, 내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건 사랑이다.


'한 번만 용기를 내 혼자 여행을 떠나라'라고 꼭 말하고 싶다. 전세나 월세 보증금을 빼서라도! '여행 끝나면 죽나? 어쩌라고?' 하겠지만 살아진다. 혼자 세상을 떠돈 힘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보인다. 당신이 죽을 만큼 힘들다면, 그 죽을힘으로 꼭 여행을 가라고 말하고 싶다. 죽음을 각오하면 엄청난 여행을 하게 되고 잘 살아진다. 그러니 죽지는 말자.


얼굴 모르는 당신이, 한 번만이라도 길 위에 혼자 나서기를. 한 번만 날개를 펴 날아오르기를... 그리고 스스로 구원하기를...


당신께 나의 유성을 보낸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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