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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9. 줄무늬 블루스.

그놈의 내공이 뭐라고.

내공'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는가. 아마 무협지 속 협객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요, 어떤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을 때 종종 그 단어를 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바닥(?)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병원 관계자분들은 아실 것이다. 유난히 당직만 서면 환자를 우르르 끌고 오거나, 까다롭고 복잡한 환자를 받거나, 아무튼 그 사람이 당직을 선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여러 사람을 긴장시키는 사람 한둘쯤 떠올리실 수도 있다. 아니, 근거 중심의 의학을 지향하는 현대의학에서, 확률과 통계에 목매는 이 집단이 이런 미신 같은 걸 믿는지 이상하다고? 정말로 있다. 내공이란 것은 정말로, 정말로 존재한다.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느 교수님은 전임의 시절에 중환자실에 환자 보러 내려가기만 하면 갑자기 안 울리던 모니터 알람들이 일제히 울렸다더라, 지진 재난 훈련을 교육하던 중에 실제로 지진이 일어났다더라, 하룻밤에 한 케이스 있을까 말까 하는 원내 심정지가 하룻밤에 몇 건씩 일어나서 백업의 백업 당직들까지 싹 다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더라. 그런 이야기들은 듣기만 해도 정말 괴롭다.


처음 이 단어를 배웠던 것은 인턴 들어가기 전에 했던 워크숍에서였다. 갓 대구에서 혼자 상경해서 어리바리하던 나는 인턴 1년 스케줄을 뽑기 전에 아이들이 우르르 매점에 가서 딸기우유, 딸기맛 음료들을 쓸어가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었다. 딸기우유가 매진되었다고 한탄하는 옆 사람(이자 나의 인턴 동기가 될 사람)에게 물어봤다. 왜 딸기우유예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게 '좋은 내공'을 불러오는 아이템이란다. 그럼 '내공'이 뭐예요?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충 행운이라고 생각하라고. 먹어서 나쁠 거야 투 머치 액상과당 섭취와 유제품 섭취로 인한 ‘장 트라볼타’밖에는 없으니 하룻밤을 무사히 넘긴다면 나쁘지 않겠구나, 그래서 나도 취직하고 나서 많이도 사 먹었다. 먹어서 그날 무사했다면 그건 딸기우유 덕이고, 무사하지 못했다면 딸기우유 덕분에 그나마 그 정도로 선방한 것이라고 정신승리도 덤으로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경제력이 생긴 현정이는 서울우유 딸기우유 말고 아임리얼 딸기요구르트 스무디를 참 많이도 먹었다.

 

나도 몰랐다. 나는 사실 내가 내공이 좋은 편이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남들은 내가 나쁘다고 다들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깨달음은 늦는 법이다. 항상 나까지가 우리 연차에서는 상위권 내공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자기 객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 믿음이 깨어지게 되었던 것이 전공의 2년 차 말, 3년 차 초부터였다. 처음 예진실(걸어 들어오는 비교적 경증 환자들을 받는 구역) 근무를 시작했던 날, 병원 근처에 화재가 나서 갑자기 재난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차분히 한 명씩 진료를 보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어디 불 나서 지금 환자들 많이 올 거니까, 준비해'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현실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 아시겠는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내 앞으로 스무 명 서른 명이 우르르 접수하는 상황, 어떨 것 같나. 'ㅇㅇ 역에 불 낸 애' 소리 한동안 듣다가 절정을 맞이한 건 3년 차 때 응급중환자실 주치의 시절이었다. 


전공의 두 명이서 중환자실 주치의를 하는데, 당직인 날 응급실에 온 중환자는 그 사람의 환자가 되는 시스템이라, 정말 내공의 정면대결 같은 한 달이었다. 물론 나는 처참하게 졌다. 또 만나면 유난히 시너지가 생기는 조합이 있었는데, 그 시절 서로 근무표를 체크하며 '또 너냐' 하고 지내던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한꺼번에 소생실 베드 2개가 다 채워지는 와중에 바깥에서 심실빈맥에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환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하룻밤에 온갖 부위의 출혈들로 저혈량성 쇼크 환자들을 맞이해서 혈관조영실 간호사의 블랙리스트도 되어보고, 병원에 있는 혈액을 죄다 써버리기도 하고, 어쩌다 한 번 할까 말까 한 소아의 응급투석을 밤 사이 두 케이스나 연속해서 의뢰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았다. 혹시 119 타고 출근하냐는 소리도 들어봤다.

 

내공이 나쁜 사람들은 그래서 믿거나 말거나지만 징크스들이 하나씩 있다. 내가 수련받은 곳에서 가장 유명한 건 내공 나쁘기로 유명한 선생님의 청진기였는데, 그분의 청진기에 손이 닿으면 그날 하루는 하루종일 힘들어질 것이라고 해서 모두 조심히 다루었더랬다. 나의 경우에는 후향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바로 줄무늬 티셔츠였다. 스스로 악성 줄무늬충이라고 별명을 붙일 만큼 나는 '세인트 제임스'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색깔별로 사모았던 시절이 있었다. 옷장만 보면 빠삐용인줄 알 만큼 매일 다른 색깔의 줄무늬를 입고 출근을 했었는데, 그래서였나, 항상 좀 앞서 말한 것처럼 힘들게 살았다. 


그러다가 영원히 응급실에서 줄무늬 자체를 금지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전임의 시절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옷이라고 입고 신나게 출근했는데, 마침 내가 있는 곳 근처 외래에서 원내 심정지 방송이 울렸다.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일이라 바로 뛰어갔다. 대부분 원내 심정지 방송은 실제 심정지가 아니라 단순 실신이나 어지럼증 등인 경우가 더 많은데, 이번에는 진짜였다. 천식 진단을 위한 메타콜린 유발 검사 중 급성 호흡곤란이 발생하며 심정지가 온 케이스였는데, 카트에 타서 심폐소생술을 하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 당시 내 모습을 본 당직서던 의국 후배 말로는 "낯익은 줄무늬 여자가 땀 뻘뻘 흘리며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더라"라고. 이후로 완전히 금지당했는데 가끔 오프인 날에 줄무늬가 들어간 무엇인가를 걸치고 응급실에 들어서면 모두에게 혼이 났다. 당장 옷 갈아입고 오라고.

 

생각해 보면 졸국 후 어디를 가나 일복이 없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직한 뒤에도 '선생님은 저희를 엄청 바쁘게 하거나, 아니면 공부하게 만들어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매일 힘들게 살았던 것만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자가 많거나 아니면 중환자가 있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이제는 스스로의 나쁜 내공을 받아들이고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자세로 살고 있는데,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그게 다 나의 재산이 되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마라톤을 해 보면 세상이 조금은 만만해진다. 내가 30km까지도 뛰어봤는데, 그깟 3km 거리 정도는 여차하면 뛰어가도 될 정도라고 생각하면 교통 정체구간에서 마음이 편해지거든. 그런 것처럼 내가 이보다 더한 것도 겪은 사람인데 이깟 일은 뭐, 하며 역치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나쁜 내공 덕분에 겪어본 것이 많아서 진단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적도 있었다.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자가면역 질환 중 '헤노흐-쉔라인 자반증'이란 것이 있다. 소혈관 염증으로 인한 자반증(피부의 붉은 반점)과 함께 관절통, 복통, 신염 등을 일으키는 병인데, 외래에서 기본적인 검사들을 한 뒤 병상이 없어 입원을 위해서 응급실로 의뢰된 케이스였다. 전공의 백업을 보는데, 이미 모든 검사를 다 했다고 판단하고 바로 입원지시를 내었기에, 아밀라아제와 리파아제라는 췌장 효소검사를 추가로 하도록 지시했다. 아주 드물지만(0.4퍼센트가량) 췌장염이 합병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나는 해당 케이스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다. 췌장염이라면 금식과 다량의 수액치료 및 입원을 요하는 상황이었기에, '설마'하는 표정의 전공의를 뒤로 하고 검사를 진행했다. 아니면 다행인 거고, 놓치지는 말자고. 그 환아는 췌장염에 부합한 소견이 확인되었고, 나는 그 이후에 0.16퍼센트의 내공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내공이 나빴던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구르면서 겪었던 것들이 결국 나를 성장시켰다.

 

존경하는 은사님, 곽영호 교수님께서는 소아응급실에 처음 근무하러 갔던 2년 차 전공의였던 내게 물으셨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역시 병원에서 생활하려면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얘 좀 보게 하는 표정으로 교수님께서는 아직 덜 컸구먼, 내공이지 내공. 이건 족보인데 몰랐냐고 농담을 하셨었다. 그때는 이게 뭔고 싶었는데, 이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많이 굴렀으니... 그래도 이제는 조금 좋아졌으면 좋겠다, 줄무늬는 멀리하고.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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