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꼬마 Feb 28. 2024

10. 본디 심성은 선하나, 화가 많다.

빠져나올 수 없는 응급실 사람들의 매력.

지컬배우 고훈정 님이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했었던가, 본디 심성이 선하나 화가 많다고. 그 말을 본 순간 나는 나를 포함한 응급센터 식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정말이지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처음 응급실이란 곳에 발을 들인 것은 본과 3학년 학생 때였는데, 응급실 실습을 나가서 처음 본 장면이 바로 건장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주취자를 제압하는 모습이었다. (그분이 바로 응급의학과 스타 작가 중 한 분인 곽경훈 선생님이다!) 아니, 응급의학과 의사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인가. 그분뿐 아니라 학생 때는 생글생글 늘 웃던 선배들이 표정들은 굳어있고(일 해보고야 알았다. 힘들어서였다. 웃을 힘이 어딨 냐) 사람들은 저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동작들에 거침은 없고 목소리들은 크고, 어쩐지 다들 괄괄할 것 같고. 그게 응급실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전쟁이란 걸 겪어본 적은 없지만, 전쟁터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겠지? 외래나 병동의 고요하고 정돈된 분위기와 다르게 정말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병원 최고의 전쟁터. 여길 지키는 사람들은 야전사령관이고.


오랫동안 나에게 응급실은 그래서, 무섭고 거칠고 힘든 곳이라는 이미지였다. 인턴 때 1년 스케줄 뽑는 날도, 응급실 턴이 몇 개인지 세어보고 이 때는 엄청 고생하겠구나 미리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6월에 처음 응급실 인턴을 돌았는데, 인계받으러 갈 때부터 혼자 졸아 있었다. 이 잔뜩 기강 잡힌 곳에서 나는 어울리지 않는 조각이 된 것 같고, 괜히 막 기가 죽어서 안 그래도 말린 어깨가 잔뜩 말린 채로 들어갔다. 처음 일하러 들어가는 곳에서 나는 늘 스스로를 그렇게 비유한다. 나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단체 줄넘기에 눈치껏 끼어들어서 뛰기. 처음부터 엄두가 안 나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계속 의심하면서 응급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학생 때 겪은 이 응급실과 다르게, 내가 직접 일하러 들어가서 부딪혀 본 응급실은 정말 달랐다. 이 괄괄하고 목소리 큰 응급실 사람들, 정말 진국인 거다.


응급실 사람들 특징 제1번. 겁나게 성질이 급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빨리빨리' 문화인데, 그중에서도 제일 성질 급한 사람들 다 모여있는 것 같다. 느긋한 성품인 사람들도 여기 오면 성질이 급해질 수밖에. 그래야 이 쏟아지는 업무량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음도 빠르고 밥 먹는 속도도 빠르고, 말도 빠르다. 인턴 때 노티하면서 배웠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거라고 하지만, 응급실에서는 결론부터 말하라고. 이건 응급의학과 사람뿐 아니라 응급실에서 환자 관련 보고를 받는 다른 과 선생님들도 많이들 말씀하신 것이기는 한데, 결론을 일단 먼저 말하고 부연설명을 하라는 거다. 예를 들어 '7세 남환 ㅇㅇㅇ가 오른쪽 아랫배 통증으로 내원하였고 검진상 오른쪽 하복부 압통이 있으며 발열과 구토, 설사가 동반되었습니다. 혈액검사가 어떠했으며 이에 초음파 검사를 시행했고 충수돌기염 확인되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7세 충수돌기염 환아가 있어 연락드렸습니다.'부터 말하고 시작하자는 것이다. 긴 말을 하는 것도, 긴 말을 듣는 것도 서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2번. 대체로 화가 많다. 응급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대개 엄청나게 예민하다. 갑작스럽게 아프거나 다쳐서 오기 때문에 인내심이 그리 남아있지 않은 상태들이 많다. 사람의 다정함은 생각보다 쉽게 바닥나는 것이기에, 대체로 평소보다 까칠해지기도 하고 짜증도 많은 편이다. 그 정도면 양반일지도 모른다. 주취상태로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와서 술주정을 부리거나 의료진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분들도 종종 있다. 말이 안 통하거나 몽니를 부리는 분들을 상대하다 보면 의료진도 사람인지라 화가 쌓인다. 남의 화받이 욕받이를 몇 시간 내내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나. 마음의 곳간이 쉽사리 바닥나게 될 수밖에.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가능하면 앞에서 대놓고 싸우지는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수련받으면서 나도 화가 많아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제3번. 냉정하다. 화가 많은데 냉정하다고? 이게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가, 아니면 연륜 있어 보이는 젊은 여의사 같은 소리인가(실제로 민원에서 내가 들은 말이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드는 순간 급격하게 냉정해지는 것이 응급실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응급실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자원을 중증도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하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치료를 다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생사를 넘나들거나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을 수 있는 질병이나 외상을 다루는 곳이 응급실이기에 그들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프다지만 눈앞의 심정지 환자 앞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겠는가. 


또한 응급실에서는 모든 검사가 다, 빨리, 가능할 거라는 환상을 갖고 오시는 분들이 있다. 아니다. 오히려 응급실에서 가능한 검사들은 한계가 있다. 검사실 장비나 직원이 필요한 검사들은 대개 평일 낮시간, 외래에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고, 외주를 맡겨야 하는 검사들은 며칠씩 걸린다. 흔히들 CT 빨리 찍으려고, MRI 빨리 찍으려고 오셨다는 말씀들도 하시는데, 기본적으로 응급실에서 시행하는 검사들은 이미 정규시간 예약된 분들 틈에 정말 급한 분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검사다. 응급이 아닌 분들은 당연히, 빨리 검사를 원한다고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중증도가 높지 않은 분들께는 다소 싸늘해질 수밖에. 이 속성 때문에 소아응급이 응급의학과에서 다소 인기가 없기도 하다. 대부분 응급실에 내원하는 소아들은 경증이 많다. 당일 밤에 시작된 단순 발열이 보호자에게는 물론 걱정일 수 있다. 해열제를 먹여도 떨어지지 않아서 애타는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중증 세균감염은 아니라는 판단이라면, 원하는 것처럼 모든 아이에게 '해열 주사'니 '수액'이니 하는 것을 해주지 않을 수밖에. 당연히 보호자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럽겠지만, 경증은 경증이다. 의료인의 판단과 보호자의 걱정 사이 간극이 큰 경향이 많아, 응급의학과 의사들에게 썩 매력적이지는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제4번. 응급실 식구들은 정말 끈끈하다. 이 4번이 응급실 인턴을 돌면서 느낀 큰 매력 중 하나였는데, 윗년차라고 아랫년차에게 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일을 하고 언제든지 도와줄 준비를 하시는 게 놀라웠다. 인턴이라고 해서 마냥 부려먹지 않고 궁금한 것 여쭤보면 논문 찾아봐서 가르쳐주시는 교수님도 계셨다. 1년 차 때 갑작스럽게 내 담당 구역에 환자가 몰려왔었는데, 백업보시던 교수님께서 구세주처럼 등장해서 환자들을 보면서 교육을 해주시기도 했다. 의사들끼리도 그렇지만 간호사나 응급구조사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다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응급 환자가 생기면 다 같이 달라붙어서 고비를 넘기고, 새벽에 환자 좀 끊기면 간식도 나눠먹고, 오늘 힘들었던 일들도 이야기하면서 툭툭 털고 다시 일하는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나 역시도 수련받으면서 친해졌던 간호사 선생님들, 구조사 선생님들 중 지금도 연락하며 안부를 챙기고, 가끔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는 분들이 몇 분 있다. 그렇게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시간이 있었기에 힘든 근무 한 번 한 번을 넘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잠시 응급실을 떠나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 보니까, 그때의 복작거림과 끈끈함이 좀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더라. 내 진료실 한 구석에서 내가 할 일만 충실하면 되는 일은 조용하고 쾌적해서 좋은 한편, 또 누군가와 함께 일하며 손발을 맞추는 그 재미가 아쉬워지는 것이 있었다. 응급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공간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있었기에 좋았다. 한 번 알게 되면, 못 헤어나는 응급실 사람들의 매력, 나만 알기는 조금 아깝다.

작가의 이전글 9. 줄무늬 블루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