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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8. 나의 병원생활 3대 신조.

의사들은 무슨 생각하며 일 해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기회 될 때마다 말하는 나의 병원생활 3대 신조가 있다.


첫 번째. 오늘도 무사히.

두 번째, 나만 아니면 돼.

세 번째, 뭐라도 해야지.


첫 번째 신조. 오늘도 무사히. 이것은 매 근무마다 시작하며 속으로도, 입 밖으로도 자주 했던 말이었다. 응급실 근무의 가장 큰 특성은 바로 불확실성이다. 응급실 근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꼽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인데. 업무의 상한선이란 것이 정해져 있기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아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근할 수밖에. 어제는 괜찮았다고 해서 오늘 괜찮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도 무사히를 외치며 일했다. 무사하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환자가 감당이 안 되는 선으로 많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수준의 중환은 안 왔으면, 경환이라고 생각하고 본 환자가 사실은 중환인데, 내가 놓치지 않았으면. 그리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수준의 진상 보호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의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는 수준으로 일할 수 있었으면. 그런 아주 구체적인 바람을 한 마디 말로 요약해서 '오늘도 무사히'. 근무 시작하며 오늘도 무사히,라고 선수 쳐주는 간호사들도 있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진심 아니겠는가. 무사하지 못한 하루를 많이 보냈기에, 이 말을 입밖에 내는 나는 상당히 진심이었다.


두 번째 신조. 나만 아니면 돼. 언뜻 매우 비겁하고 얍삽하고 졸렬해 보인다면, 당신이 옳습니다. 나는 적당히 찌질하고 비겁하고 가늘고 길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건 내가 원조가 아님을 고백한다. 학생 때 배운 말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신조로 살아간다던, 꽤나 유쾌하던 교수님이 있었다. 금요일 오후 퇴근시간 다 되어서 당일접수하는 환자가 있더라도, 내 외래만 아니면 된다고 그러셨던가, 그러면서 덧붙인 말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순진한 학생 때는 속으로 의사라는 사람이 환자 안 봐서 좋다는 말을 저렇게 하나, 남의 고통에 기뻐하는 것인가 하며 속으로 약간 반감을 가졌던 것을 고백한다. 단물 다 빠진 지금과는 달리, 학생 때의 나는 꽤나 반짝거리는 이상주의자였으니, 이해해 주시라. 하지만 인턴 들어가고 그 후로 병원 생활의 쓴맛 단맛 다 보고 나서 깨달았다. 아, 정말 현명하신 분이었구나. 교대 근무를 하는 직업을 가진 나에게는 더더욱 와닿는 말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날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은 당연히 나의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근무가 아닌 시간에 벌어진 일은?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이야기다. 나 말고 나보다 더 훌륭한 누군가가 이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것이니. 내가 아니면 일단 됐다. 항상 방에 불이 켜져 있을 수는 없듯이, 나도 온오프를 조절해야 한다. 일단 나를 비껴간 불행이라면 그것에 감사하고, 다시 외치자. 오늘도 무사히. 나만 아니면 돼.


나의 병원생활 마지막 신조. 뭐라도 해야지. 나의 첫 번째, 두 번째 신조는 이 마지막 신조가 있어서 완성된다. 정말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럴 때일수록 뭐라도 해야 하는 것 같다. 일이 완전히 익숙하지 못하던 저 연차 전공의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한마디만 고르라면 바로 이것. 환자가 갑작스럽게 몰려들어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는 상황, 간호사가 환자 관련해서 노티를 해도 그게 내 환자인지조차 인지를 못할 정도로 바쁘던 상황은 누구나 한 번 정도는 겪어보았을 것이다. 뭐부터 해야 할지. 일단 환자들 증상에 따라서 검사들을 하자, 검사를 하고 나면 결과가 나올 것이고 그걸 확인하고, 그다음에 설명을 하는 거야. 처음에 안 좋았던 사람은 결과 나오기 전에 한 번 다시 가서 보자. 이 환자는 도대체 뭔지 모르겠으니까, 한 번 더 보고 윗년차 선생님이나 교수님 하고 빨리 상의를 하는 거야. 그리고 이 환자는 비교적 경증이니까, 빨리 보낼 수 있으면 빨리 보내자. 스스로를 컴퓨터라 생각하고 알고리즘을 짜듯이 뭐 다음에 뭘 하자,라는 걸 메모장에 적어두든, 머릿속으로 기억하든 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만 1년 차 시절 처음 중증도 높고 환자 많기로 유명했던 일명 "EMO" 구역(심장계, 신경계, 외상을 묶어서 보는 구역이었다)에 근무를 시작했던 나는 근무를 보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도 하기 어려웠거니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컴퓨터 앞에 멍하니 클릭만 하고 있었는데, 구조의 손길이 왔다. 다른 구역도 바빴는데, 내가 정신을 놓은 것 같으니 의국 선배님이 도와주러 오신 것이다. 어떤 환자인지 나에게 물어보고, 방향을 잡아주면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현정아, 이 환자는 시간이 해결해 줄 환자야. 일단 이 환자는 기다려보고, 이 환자는 좀 안 좋아 보이니까 잘 봐야 해. 가서 한번 더 보고, 증상이 나빠진 게 있는지 확인하고 결과 나온 데까지만 설명해 봐. 환자들 많이 몰리게 되면 당연히 혼란스럽겠지만, 그럴수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 그래야 네가 일이 줄고 편해. 환자가 오면 일단 대략적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거라는 걸 미리 말해주는 습관을 들여. 검사 좀 해보겠다는 말보다는, 어떤 병이 의심되고 걱정되니 무슨 검사를 할 것이고, 여기서 결과에 따라 뭘 할지 결정하겠으며, 대략 검사결과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지금 응급실이 혼잡해서 더 걸릴 수 있다고 해. 혹시 불편한 게 있다면 담당 간호사 통해서 말해달라고 부탁해. 정말 할 일이 많았다는 걸 깨닫고 하나씩 하다 보니 또 시간은 가고, 어떻게든 또 환자들은 입원이든 퇴원이든 전원이든 정리가 되었다.


한편, 다른 의미의 '뭐라도 해야지'가 또 있다. 말은 입 밖에 내뱉으면서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환자들일수록 내가 지금까지 놓친 것이 없는지, 뭘 더 해줘야 할 것이 있는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꼭 필요했는데, 환자 정말 잘 보시던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항상 중환들을 보며 습관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우리 뭐 더 빼먹은 게 있나? 우리 지금까지 뭘 했고, 뭘 안 했지. 어떤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고, 그걸 보면 우린 뭘 더 해 줘야 할까"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 그게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말로 하면서 비로소 정리가 되고, 그러면서 더 할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어차피 인해전술에 장사 없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인 상황이고, 나에게 어려운 환자는 모두에게 어려우니, 머물러 서서 발만 동동 구르며 힘들어하느니 지금까지 뭘 했고, 뭘 더 해야 하는지를 돌이켜보면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노라면, 또 그 상황은 지나가는 법이었다.


그렇게 나의 병원생활 3대 신조는 완성되었다. 오늘도 무사히, 나만 아니면 돼(지만 보통 내가 당첨되곤 한다....), 뭐라도 해야지. 오늘 근무도 무사히, 무사히, 제발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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