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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14. 1인분이 될 수 있게.

순두부 멘탈이 부침두부 멘탈로 진화하기까지. 

의국 후배가 예전에 회식에서 했던 건배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다른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3월 첫 턴을 소아응급실에서 시작했던 친구인데 모두가 인정하는 'best improvement' 전공의였다. 첫 주는 정말 뭘 해야 할지도 몰라서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고 있더니, 마지막 주에는 제법 능숙하게 응급실에 온 아이들 초진을 보고 있던 성장캐. 과마다 한 달 근무가 끝나는 인턴이나 전공의들에게 소위 '페어웰'이라고 맛있는 밥 먹으면서 고생했다고 격려해 주는 회식 자리가 있는데 여기서 건배사를 시켰더니 그랬다. 


"다음에 올 때는 1인분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1인분! 을 힘차게 외쳤다. 신선한 건배사였다. 1인분이라, 생각해 보면 그거 참 어려운 일 아닐까. 당연히 돈 받고 하는 일에서 제 몫은 해야 하는 것이 맞기는 하는데, 그게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능이기는 한데, 한 사람이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아쉽게도 병원에서는 그 시간이 참, 없다. 정말 모자란다. 모두가 즉시전력감이 되어야 빠듯하게 돌아가지만, 현실적으로 순환근무를 하는 인턴이나 전공의 저 연차 시절에는 그 시간이 정말 아쉽다.


수련을 받는 위치에 있는 인턴이나 전공의는, 직장인이기도 하지만 한편 피교육생 이기도 하다. 교육에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한데, 특히 인턴은 한 달마다 턴이 바뀌어서 조금 일이 손에 익을만하면 다른 과로 가야 한다. 이제 좀 내가 수술방 루틴이 익숙해지고, 내가 어느 위치에 서서 어떤 수술도구를 잡고 있어야 하는지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는데, 다음 날부터는 응급실에서 열이 나거나 배가 아파서 오는 소아 환자들의 초진을 보고 전공의에게 환자보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열두 번 겪고 나면 전공과목을 갖게 된다. 


전공의가 되면 이제는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차적으로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2월 28일 오후 11시 59분까지 나는 심전도를 찍으라는 오더에 찍어가면 끝났지만, 3월 1일 자정부터는 새 인턴이 찍어 온 심전도를 받아서 해석하고, 이 심전도의 소견과 환자의 임상증상, 과거력 등을 종합해서 진단을 내리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우당탕탕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하다. 병원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3월에는 아프지 말아라.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모두가 익숙하지 않은, 학생 같은 인턴과 인턴 같은 전공의와 전공의 같은 전임의, 신규 간호사가 모두 사이좋게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잔인한 달, 그것이 3월의 병원이다. 특히 인턴으로 일을 잘하는 것과 전공의로 일을 잘하는 것,  그 이후는 정말 많이 달랐다. 나도 정말 많이 좌절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전공의 1년 차 3월에 나갈 결심을 두 번이나 했었다. 나는 내가 굉장히 일을 잘할 줄 알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이 독이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전날까지 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내과 파견 턴이었는데, 응급실 인턴 때 환자 열심히 잘 본다고 예쁨 받다 보니 당연히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응급실과 병동은 좀 다른 생태계인 것을 알고 적응하는 데도 생각보다 많이 헤맸다. 응급실에서는 당연히 환자들에게 진단을 하고 처치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검사를 하되, 어느 정도 넓게 그물을 친다고 하면 진단이 되어 올라온 다음의 환자들에 대한 처치는 달랐다. 밥을 먹일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식이를 할 것인가부터 수액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현재의 항균제는 처방이 적절한지, 시작을 했다면 언제까지 이 약을 쓸 것인지, 혈액검사는 추가로 할 것인지 아닌지, 한다면 무엇이 궁금하고, 그 결과에 따라 내 판단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번 고민해야 했다. 환자가 표현하는 불편감에 대해서 나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결할 것인가. 지금 쓰는 약은 환자의 신기능이나 간기능을 고려했을 때 적합한가. 어제와 오늘 환자의 변화는 어떻고, 나는 그럼 이 환자에 대해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판단하라는데, 솔직히 정말 하나도 몰랐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예 모르는 일을 맞닥뜨리면 내가 뭘 모르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중압감에 일은 더 손에 안 잡히는데 뭔가 해달라는 간호사들의 노티는 오고, 환자들은 컴플레인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처음 교대하자마자 파악도 덜 된 내 환자가 심정지가 왔다. 중환자실 당직 선생님들이 환자에 대해서 묻는데 파악도 안 되어 있으니 당연히 매섭게 혼이 났다. 그다음 당직을 서는데 다른 환자가 나빠졌고, 중환자실 당직 선생님께 상의드렸는데 '갈 테니까 환자 매니지 하고 있어요'라는데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환자를 '매니지' 하라고? 그게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연히 혼이 났다. 내가 오는 동안 도대체 환자한테 해준 것도 없이 멍하니 서 있으면 어쩔 거냐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 같은 함량 미달의 의사가 환자를 보는 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하자.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에게, 그땐 당연히 그러니까 뭐라고 하든 말든 혼 난 건 혼나는 거고, 응급실에 내려가서 응급실에 있는 윗년차 선생님들 붙들고 살려달라고 하라고 했을 것 같다. 1인분이 아니라 0.1인분도 하는 게 쉽지 않은 거 당연하니까, 난 쓰레기라고 슬퍼할 여유도 없어야 하니 그냥 살고 보라고. 어차피 1년 차의 특권은 몰라도 된다는 거니까 괜찮다고 했을 텐데. 화살이 날아와서 박혔으니 일단 뽑고 봐야지 어디서 화살이 날아왔나 고민하고 있을 겨를이 어딨 냐는 부처님 말씀 못 들었냐고. (붓다는 아무래도 ESTJ일 것이다) 과장님과 윗년차 선생님들과 동기들이, 방황하던 나를 정말 많이 붙잡아줬다. 뭘 물어봐도 좋으니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처음부터 잘하면 수련이란 게 왜 있냐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보라고 용기를 주시기도 했다. 부모님도 대구에서까지 올라와서 서른 다 되어가는 딸 보러 오셨고, 본가에서 키우던 강아지까지 한 2주 가까이 서울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강아지별에 있는 우리 예원이, 고마워.)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나아졌다. 거짓말같이 조금씩 그렇게 모르겠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익혀졌다. 호되게 혼난 일들이 한두 번도 아니지만, 그것도 좀 무뎌지기도 했다. 내가 아니라 내가 한 잘못에 대한 일이다,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억울하면 빨리 일 잘하게 늘자. 누구한테라도 배울 수 있으면 배우고, 매달리자. 그렇게 시간이 약이었다. 조금씩 일이 익기 시작하면서 지난달의 나보다는 이번달의 내가 훨씬 낫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충분한 1인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들기 시작했지만. 


가끔 생각한다. 내가 만약 그때 그만두고 나갔더라면 지금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다시 전공을 택한다고 했을 때 1순위가 응급의학과는 아니다. 소아청소년과도 더더욱 아니고 소아응급은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꽤 매력적인 후보 중에 응급의학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 두루두루 아는 것 많고 싶고 복작복작한 응급실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하고 치대면서 일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에게 응급의학과 딱이지 않나. 


아마 그때 내가 그만뒀더라면 응급의학과는 안 했을 것이고 지금보다는 좀 더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만뒀다는 사실 하나가 오랫동안 마음속의 가시로 남아 나를 쿡쿡 찔러댔지 않았을까. 시간을 돌려서 그때로 간다면, 그래도 그때의 나에게 그 시기를 어떻게든 지나 보기는 하라고 했겠지, 그리고 말했겠지. 삼성, 테슬라 주식 사고... 응... 비트코인이란 것도 나중에 좀 관심 가져보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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