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꼬마 Feb 28. 2024

13. 떠나지 못하고 눌러 앉은 이유.

DNA coding error. 놀면 뭐 하니. 

일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참 웃긴다. 의대를 들어갈 때는 다들 못 들어가서 안달이고, 들어가고 나면 빨리 나오고 싶어서 안달이랬는데. 나오고 나니 정말 학생 때가 좋았다는 말만 하고 다녔다. 일하지 않고 돈이 갖고 싶다, 눈먼 돈 어디 입양 못하나 헛소리하면서 매주까진 아니지만 가끔 로또도 샀다. 한 번도 당첨이 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일하기 싫다는 말을 하면서 졸업 후 10년간 정작 일을 놓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턴, 전공의 수련 마치고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한 채 전임의를 하지 않고 나갔을 때도 일은 계속했다. 


심심해서 카카오톡 '사주 보따리'에서 (세상에, 비대면으로 사주도 볼 수 있다니.) 사주 봤더니, 역마살이 아주 강하게 든 팔자인데, 이 팔자에서 가장 경계할 것이 '경력 단절'이지만 나의 경우에는 일복이 아주 터져서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단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일복 아주 많게 살다가, 작년부터 급격하게 번아웃이 오기 시작했다. 교대근무 10년 짬이면 이제 밤 근무 다음 날 컨디션 조절하는 법 정도는 잘 알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점심 때는 일어나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햇볕도 쬐고,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데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좋아하는 뮤지컬을 아무리 보러 다녀도, 친구를 만나도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이었다. 어느 날 출근하다가 지하철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할 때 즈음에 일을 내려놓았다.


노니까 처음에는 정말 좋았다. 제일 좋았던 건 수면패턴이 아주 규칙적으로 잡힌 것이었다. 밤에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한 번도 일주일 넘게 이렇게 규칙적으로 자 본 적이 없었다. 알람 없이도 오전 여덟 시 전에는 알아서 눈이 떠졌다.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도 하고, 균형 잡힌 식사도 했다.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전시회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떠나기도 하고, 그냥 가 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다른 도시로 떠나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보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특히 결혼이나 이직으로 다른 지방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만나달라고 연락들을 돌렸다. 시간이 맞지 않아 못 보더라도 그냥 그 핑계로 연락 한 번이라도 더 하니 그것도 좋았다. 근무 때문에 못 봤던 공연도 정말 실컷 봤다. 대학로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직장인 극단에 뮤지컬 연습도 신청해서 들어갔다. 그러다가 지치는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쉬기도 했다. 시간이 참 잘 갔다. 그렇게 놀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딱 한 달 반. 뼈가 부러졌다 붙을 시간 정도가 지나자 지겹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들이 싫어졌다. 세상에 내가 쓸모가 없어진 기분이라 해야 하나. '응급의학과 의사, 소아응급 전문의'라는 정체성이 슬프게도 나에게 너무 크게 차지하고 있어서였던 걸까. 그냥 나 자신으로서 세상에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머리로는 하지만 누군가 나를 좀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들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법이야 많았다. 매주 꾸준히 하던 운동이나 노래도 그랬고, 뮤지컬 연습도 그랬지만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자리가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처음에 가기로 했던 직장에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겨 이직 시기가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되었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폐인 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를 벌든 조금이라도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진센터 문진 자리가 있어 출근을 시작했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착하다.


첫날 내 감상이었다. 건강검진을 위해 내원한 사람들('환자'가 아니라 '고객'이었다. 입에 잘 붙지 않는 말이었다)의 평소 생활 행태나 과거 기저진단명, 복용 약물 등을 묻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상담하는 일이었다. 건강한 성인들과 대화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응급실에서 담배 끊어라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을 하면 화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잔뜩 예민해져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찌나 그렇게 순하고 착한지. '담배 끊어야 되는 것 본인도 잘 아시죠?' 하고 말하면 겸연쩍은 듯 웃으면서 노력해 보겠다는 말을 하시는 분들을 보다 보니 신기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오지랖 넓고 스몰토크 잘하는 사람답게, 어깨가 많이 말린 채로 일하니 아프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께는 어깨 스트레칭도 알려드리고, 당뇨 진단을 받았는데 식후 운동 안 하시는 분들한테는 벽 스쿼트라도 하라고 운동 방법도 알려드리고, 생리는 할 때는 힘들었는데 갱년기 되니 그것도 서럽다는 분들 상담도 해 드리면서 나름 정성껏 일했다. 그냥 주어진 일만 해도 됐지만,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었다. 덕분에 건강검진 문진방 와서 이렇게 성심성의껏 봐주는 사람 처음 봐서 감동했다는 분도 꽤 있었다. 진료실은 늘 깨끗했고, 아침에 출근하면 간단한 아침식사도 늘 챙겨져 있었고, 일은 오전이면 끝나서 좋았다. 일찍 일어날 강제성도 부여되고 내 시간 쓰기도 좋았다. 월급이 아주 많진 않았지만, 일주일에 4번 오전에만 일하는데 전임의 시절보다 더 많이 돈을 벌었다. 일반의도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월급이 짠 축에 속하는 일인데도 이 정도였으니, 이래서 의대생들이 요즘 수련 안 받으려고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참 가성비 떨어지는 일이 수련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전문성이 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으니 자존감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19 구급상황센터 지도의사 일도 시작했다.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던 일이었다. 바쁘다는 말은 솔직히 핑계였고, 심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더 신청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이 참에 해 봤다. 119 구급대원들에게 유선으로 의료지도를 하는 일이었다. 심폐소생술 유보건, 심폐소생술 의료지도, 응급구조사의 업무범위 내에서 업무 승인하기(저혈당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잡고 포도당 수액 주입하기, 설하 니트로글리세린 주입 등), 이송거부건 승인하기, 이런 일들을 했다. 일반인 상담 중에서 구급대원 선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변도 해주었다. 서 있는 곳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고, '일단 여기는 환자는 볼 수 있잖아요' 하고 밀고 들어오던 구급대원들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소아응급 전문의라고 하니 상황센터에서 참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인의 상담 중 80퍼센트 가까이가 소아 관련 상담이었다. 양가감정이 들었다. 'ㅇㅇ 구에는 지금 소아 진료 봐주는 병원이 없어요. 갈 수 있는 다른 병원들 안내드릴게요', 혹은 '아이가 너무 어려서 지금 받아주는 병원이 많지 않으세요' 같은 말들을 듣고 있노라니 어딜 가나 밤에 소아과 진료가 가능했던 세상이 불과 몇 년 전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들어보면 당일 발생한 단순 발열들이었기에, 이걸 굳이 이 시간에 응급실을 가야 하는지 갈 곳을 찾아달라고 상담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송거부건 처리를 하면서 검진센터에서 생각했던 것과 아주 반대의 생각을 했다. 역시, 사람들은 말을 안 듣는 것이 기본 속성이로구나. 일면식도 없는 나는 당신이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가야 될 사람들은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더러는 내가 유선상으로 직접 통화를 해서 설득하기도 했는데, 반 이상은 설득에 실패했고, 가끔은 전화기 너머로 나에게 욕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맞다, 내가 있던 곳은 이런 곳이었지. 검진센터에서 말랑말랑하게 지내다 정신이 다시 번쩍 차려졌다.


일을 하며 지내니 시간이 참 잘 갔다. 인연이란 것은 정말 있는지, 이직하려고 기다리던 곳은 결국 불발되고 생각지 못한 곳으로 연이 닿았다. 처음 하던 일에서 조금 결이 다르지만,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병원 쪽에 제안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소아전문응급센터 경력이 이만큼 있는 사람인데 저는 어떠시냐고. 일이 되려고 그랬던 건지 공고를 보고 전화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물 흐르듯이 이직이 정해졌다. 처음부터 내가 갈 자리였나보다. 소아전문응급센터는 아니지만, 응급실에 온 환아들 중 입원이 필요한 아이들을 응급의학과로부터 받아서 입원시켜 하루를 데리고 있는 일이었다. 전 직장에서 소아 응급병동장으로 일했던 경력도, 반쪽짜리지만 전임의 시절 소아응급 중환자실에서 넉 달 굴렀던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정말 지겹다, 지겹다를 입에 달고 살았던 일인데, 결국 이 바닥을 완전히 뜨지는 못했다. 아예 다른 일을 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직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일로 먹고살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결국 나를 여기 머물게 했다. 아마 DNA 코딩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싫다고 떠나겠다고 하고는 석 달만에 다시 눌러앉은 걸 보니.

작가의 이전글 12. 그럭저럭 하던 소아응급, 때려치우려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