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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12. 그럭저럭 하던 소아응급, 때려치우려던 이야기.

전공의 4년 내내 중환자의학 세부전문의를 할 거라고 그랬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소아응급 전문의가 되어 있었다. 정 붙이면 고향이라고, 나에게 소아응급이란 그런 존재였다. 처음 하려던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 보니 이 길이 나한테 잘 맞았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럭저럭 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직하고 나서 '소아응급 전임의 2년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라는 아무래도 특이한 행보다 보니 소아청소년과 선생님들도, 응급의학과 선생님들도 많이들 물어보셨다. 


"그거 왜 했어요?"


농반 진반으로 대답했다. 심신 미약 상태에서 교수님이 너 잘한다고 꼬셔서 했다가 코 뀄다고. 그러니 교수님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맑은 정신으로 아쉬울 것 없을 때 만나라고. 하지만 내가 코 뀄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 싫었으면 전임의를 2년씩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걸로 계속 밥벌이를 하며 살았을까. 소아응급이 희귀한 전공이고 쉽지 않은 길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장점들이 있다.


성질 급한 나 같은 사람한테, 애들은 정말 빨리빨리 잘 나아서 예뻤다. 다 죽어가다가도 수액 한 방, 배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다가도 관장하고 변 시원하게 보고 나면 또 방긋거리고 있다. 숨 쌕쌕 대며 넘어가다가도 고유량 산소(high flow oxygen) 주면서 하루 버티고 나면 다음 날은 새근새근 엄마 품에서 잘 자고 있다. 얼마나 예뻐. 경련을 몇십 분씩 했던 아이라 괜찮을까, 정말 걱정했는데 또 말짱하게 깨어나는 아이들도 있고, 심폐소생술을 하며 살아날 수 있을까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심장이 다시 뛰고 있다. 얼마나 고맙나.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진짜 애들이 잘해서지만, 내가 하는 것에 비해서 아이들이 날 명의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하게 해 주는 순간이 꽤 있었다. 애들은 그리고 편견 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들이 얼마나 웃긴데, 병원 오는데도 엘사 공주 옷 입고 가야 한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란 공주드레스로 꾸미고 오는 애들 보면 얼마나 귀여운데(물론 보호자분들은 매우 창피해하지만). 


혈액검사나 영상검사도 중요하지만, 역시 아이들을 볼 때는 자세한 문진과 섬세한 검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좋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넘어져서 울고 있는데,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겠고 걷기를 힘들어한다고 데려오면, 아이를 달래고 안정시키면서 하나씩 만져보고, 걷게 시켜보면서 어디를 불편해하는지 파악하는 과정들이 얼마나 짜릿한지 아는가. 살살 고관절부터 발목까지 만져보면서 아픈 곳이 발목이었구나! 하고 찾아내는 과정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진단하는 재미가 있었다. 엑스레이 부위별로 다 찍으면 된다고? 방사선량도 그렇지만, 일단 어디를 아파하는지를 알아야 그다음이 있다. 사진만 덜렁 놓고 비교해서 골절이 없다고 확인만 하면, '골절 없으니 보세요'로 끝이다. 하지만 검진을 제대로 해서 '발목이 불편한 것 같은데 골절 소견은 없고, 아파하니 부목은 대고 경과를 봅시다'라는 결론을 줄 수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천지차이다. 


농담처럼 나는 소아 보호자들의 최고 장점이 '귀가 잘 들리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진짜다. 아이 상태에 대해서 다들 빠삭하게 잘 알고, 설명을 대체로 잘 알아듣는 편이다. 보호자의 기저 심리에는 대개 불안감이 깔려 있기에 그걸 파악하고 짚어주면 어느 정도 라뽀를 쌓을 수 있었다. 실제 성격보다 선하게 생긴 나의 외모(?)도 소아를 볼 때는 꽤 장점이 되었다. 


그럼, 그 잘하던 소아응급을 왜 때려치우려고 했냐. 심지어 분과 전임의 2년씩이나 하고, 나름 안정된 직책까지 갖게 된 마당에?


첫 번째. 환자가 너무 많았다.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대부분이 경증이라고는 하지만, 몰려오는 데는 장사가 없다. 하룻밤에 소아만 100명은 당연하다시피 넘기기 시작하니, 의료진의 피로도는 점점 쌓여만 갔다. 2018년 이대목동 신생아 사망사건에 대해 의료진 구속수사 이후, 소아과 지원자는 바닥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 그나마 남아있던 전공의들도 점차 사라져 가는 시기가 닥쳤다. 전공의가 없으니 응급실에서 소아 환자를 받지 못하게 되는 병원들이 늘어났고, 밤에 소아를 봐주는 병원 자체가 점점 귀해져 갔다. 이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끼리 하던 이야기지만, 여기가 맛집이라서가 아니고 24시간 여는 국밥집이 여기뿐이니 오는 것이라고. 솔직히 응급실 안 오고 다음날 소아과 문 열면 가도 될 애들이 태반인데, 보호자들은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일단 와서 뭐라도 해달라고 하고, 진짜 문제는 그 안에 섞여있는 중환이었다. 여기저기서 환자들이 나빠지고 있는데 내 몸은 하나고, 간호인력도 모자라고, 침상도 모자란 상황을 상상해 보라. 끔찍하지 않은지. 비슷한 상황을 몇 번 겪고 나면서 내 의지와 무관히 사고를 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컸다. 우리나라 법은 불가항력인 사고에도 의사에 대한 처벌을 상당히 엄격히 하기에, 더욱더 그랬다. 


두 번째. 보호자들의 '진상도'는 응급실 환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어쩌면 이게 요즘 트렌드인 것 같다. 최근 교권 추락에 관한 이야기들이나, 어린이집에서나, 소아를 보는 직종에서 다 비슷한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내가 돈 내고 내 애 맡겼는데 너 왜 내 말대로 안 하니. 이게 보호자들의 기저에 깔린 심리다. 좋은 보호자들도 많이 봤지만, 응급실에 환자들이 늘어날수록 내 아이의 진료에 소홀해질까 걱정이 되신 건지, 그 불안감이 비틀린 방향으로 나타나신 건지, 의료진에게 그 감정을 투사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났다. 시작부터 화가 나 있거나, 본인들이 원하는-대부분의 그놈의 수액과 항생제, 해열주사-것을 해주지 않으면 불만을 강하게 표출했다. 소리를 지르고 싸울 일이 아닌데 본인들의 의사를 관철시킬 때까지 같은 태도를 고수하면, 참 난감하다. 그런다고 더 잘해주지 않는다. 


모든 의료진이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생리대 한 번 못 갈고 일해서 어떻게든 초진 대기 빨리 봐주려고 봐줬더니, 대기 2시간이라더니 30분 기다렸다고 상황을 너무 과장한 것 같다는 민원도 있었다. 글쎄, 이런 것까지 민원을 받아야 하나. 녹음도 그렇다. 양해를 구하고 녹음을 하신다면야, 나도 같이 녹음하면서 하시라고 말씀드릴 수는 있다. 솔직히 모든 환자들이 내 말을 녹음한다고 생각하고 진료를 본다. 하지만 아무리 당사자 2 인간 녹음이 불법은 아니라지만, 누가 내 말 하나하나 다 녹음하면서 꼬투리 잡을 걸 생각하면, 어떨 것 같나. 최대한 방어적으로 말할 수밖에. 그리고 몰래 녹음해서 입맛에 맞는 말만 편집해 버리면 끝이다. 그렇게 당당하시면, 내가 같이 녹음하겠다고 말할 때 녹음기를 그제야 끄시나. 가까운 사람이 아이 진료를 보면서 녹음기를 켜고 진료실을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도, 정말 시쳇말로 현타 오는 기분이었다. 


세 번째, 그렇다고 병원에서 위상이 높으냐. 아니다. 병원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의료란 것이 어느 정도의 공공성은 있고, 아이나 노인, 사회적 취약계층의 진료가 비용 때문에 제한되는 일을 어느 정도는 막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병원이 돌아가려면 수익을 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소아? 같은 기간 동안 성인응급실에 비해서 일평균 환자 수가 10명 이상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익은 반토막도 되지 않았다. 돈 못 벌어주는 파트는 인력 충원이나 시설 지원 등도 쉽지 않았다. 소아 진료를 하지 않는 의료진은 어쩌면 이해를 못 하실 것이다. 아니 뭐 성인처럼 죽을 환자 보는 것도 아니요, 끽해야 감기 장염이 대부분인데 뭘 그리들 힘들다고들 하는지. 소아 진료를 볼 때 얼마나 품이 들고, 얼마나 심력이 소모되는지 이런 건 아무도 모른다. 소아 전원 하나 보내는데 하루 안에 되면 천운이라는 사실도, 소아응급 안 하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다. 


다행히 나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 지친 얼굴을 마주하며 기대고 가기에는 내가 그중에서는 가장 의지가 약했던 것 같다. 병원을 가는 길에 지하철이 멎거나 차에 치이면, 출근을 안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나도 들었다. 내가 잘하고 잘 맞던 일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크게 사고를 치든, 몸이든 마음이든 아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직을 결심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걸 참 좋아하시던 우리 부모님도 예상외로 나를 말리지 않으셨다. 뭐든 네가 행복한 걸 하렴, 네가 그 병원 주인도 아닌데 그 집 살림에 무조건 매일 게 뭐니. 그렇게 나는 5년째 하던 일을 놓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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