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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17. 네, 제가 보겠습니다.

내가 자신있게 하고 싶은 한 마디. 

병원에서 일하면서 내가 자신있게 하고 싶은 한 마디라면 이것이다. 아마,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실력을 쌓고 싶은 것이다.  

네, 제가 볼게요. 

선선히 이런 말이 나오는 선생님들을 늘 동경했었다.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별 것 아닌 한 마디처럼 보이겠지만 아니다. 이 정도 환자는 내가 볼 줄 알고, 어렵지 않으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때나 쉽게 나오는 말이다. 당연히 내가 봐야 할 환자라서 보는 거지만, 그래도 흔쾌히 모든 환자를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내가 이 환자를 응급실 안에서만큼은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어야 그 말이 나온다. 아니면?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일단 인정하고, 뭘 찾아보든 도움을 요청하든 방법을 찾는다. 


그 전에 일하던 직장의 응급실 평일 낮 시간에는 외래에서 환자 의뢰가 제법 오는 편이었다. 외래에서 할 수 있는 검사나 처치는 한정적이기에, 급히 평가하거나 처치가 필요하면 응급실로 보내게 된다. 대부분은 나도 내 나름대로 경험도 있다보니 크게 어렵지 않은 환자들이다. 장염이라고 외래를 접수했는데 탈수가 심하거나, 열이 오래 나서 혈액검사를 요구하는 케이스나, 환자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빠른 평가가 필요한 케이스들이다. 보내기 전에 보통 전화를 주시고, 대략적인 환자 계획을 미리 상의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던 날 하루는 응급실에 신생아 분과 교수님이 직접 환아를 데려오셨는데, 전화하실 겨를조차 없이 외래 대기 중에 환아가 숨쉬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서 데려오셨다고 하셨다. 이제 겨우 두 달 인생. 미숙아로 태어나서 신생아 중환자실 케어를 받았고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폐 표면 활성제(surfactant : 35주 이하 미숙아에서는 분비되지 않는다)도 투여했던 병력이 있는 아이였다. 안 그래도 어린데, 다른 아이들보다 더 약하구나. 환아의 형제가 감기에 걸려 있고, 환아도 어제부터 기침, 콧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산소 포화도도 90퍼센트가 되지 않고, 호흡도 가쁘고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옴폭옴폭 들어가고 코도 벌렁거리면서 온몸으로 힘들다고 외치고 있는 작은 아이. 청진해보니 호흡음이 거칠고 기도가 막힌 천명음이 전 폐야에 들렸다. 신생아에게 흔하지만 무서운 모세기관지염, 마침 RSV 바이러스가 돌던 시절이었다.


아무래도 교수님이 보시던 아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신생아를 전공하지 않은 내가 미덥지는 않으셨는지 떠나지를 못하시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분도 그 분을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이 있고, 응급실은 내가 있다. 내가 못 볼 수준은 절대 아니다. 각자의 역할을 각자의 필드에서 해야지. 


교수님, high flow (high flow nasal oxygen : 코로 흡입하는 고유량 산소. 기도삽관하기 전 단계에 널리 이용되는 장비로, 신생아 모세기관지염에서 많이 쓰는 장비) 걸게요. 애기 5kg라서 10L/min으로 시작하고, 네뷸라이저 돌리고, 중환자실 쪽은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따로 챙길 게 있거나 상황이 바뀌면 연락드릴게요.


이 환자는 나도 알아서 잘 볼 수 있으니, 맡겨달라는 의미였다. 본인이 생각하는 치료방향과 다르지 않으셨기에 그제서야 조금 안심하신 듯 가셨다. 아이들의 매력은 역시 치료하는 대로 잘 받아먹는 것이어서, high flow 를 걸고 네뷸라이저 및 수액 치료를 하면서 한두 시간 지나자 엄마 품에서 쌔근쌔근 잘 잤다. 호흡음은 아직 천명음이 남아 있었지만, 처음처럼 그리 헐떡대지도 않았고, 산소요구량도 줄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잘 받아먹은 덕분이다. 물론 이런 건 처음 본다고 신기해하는 1년차 전공의와, 이렇게 환자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질 수 있냐고 눈을 반짝이던 인턴에게는 내가 원래 잘 해서 그렇다고 한껏 잘난 척을 했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아부를 좋아한다고 인계가 됨이 분명해서, 교수님의 위대함을 한번 더 느끼는 하루라는 엎드려 절 받기를 받아냈다. 


소아응급으로 세부 분과를 처음 정하고 발을 들였을 때라면, 아마도 나는 쉽게 네, 제가 알아서 보겠습니다란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어려운 병도 아니고 흔한 병이고, 소아과 전문의라면 누구나 자신있게 혼자서 볼 수 있는 수준이겠지만 나는 그릇이 간장종지기에 그랬다. 마, 스스로 성장한 거 좀 기뻐하면 안 되나. 간장 한두방울 들어가던 게 한 서너 스푼은 들어가게 그릇이 커진 것을 스스로 실감하면서, 혼자서 뿌듯해하며 집에 가는 길에 돈 있으면 떡 사먹자고 기분 좋게 근무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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