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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2. 사명감 없는 사람이 하는 소아응급 이야기.

그냥 일 잘하고 싶은 사람인데요.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소아응급이라는 전공과목 자체는 굉장히 생소할 것이다.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아직까지 다소 낯선 전공이기도 하니까. (아닌가, 재작년 말부터 소아응급실 대란이니 뭐니 해서 이제 좀 핫해졌나. 아무도 안 하는데 있기는 있어야 되는 뜨거운 감자 같은 그런 존재?) 대한 소아응급의학회의 정의에 따르면, 소아응급 세부전문의란 대한민국 법정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뒤, 학회의 수련프로그램을 완료하고 시험에 합격한, 소아응급의학 영역의 다양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임상 의사를 말한다. 소아청소년과와 응급의학과 전문의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2022년 10월에 처음 신설된 아주 따끈따끈한 세부전문의 자격이다. 소아청소년과와 응급의학과의 교집합인데, 사실 이 교집합 자체가 크지가 않다. 응급실도 호불호가 매우 갈리는 곳인데, 소아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응급실의 속성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에 뿌리는 두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적인 것을 원한다. 업무 로딩의 상한선이 없고 언제 무엇이 닥칠지 모르는 이 불안정한 공간, 심지어 24시간 돌아가야 하기에 당직업무가 필수인 이곳은 그리 선호도가 높은 곳이 아니다. 한편 소아는 전통적으로 극호와 극불호로 갈리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응급실에서 대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순간부터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기에, 대개 경증으로 내원하는 소아의 진료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을 수밖에. 무엇보다 보호자를 대하는 문제가 쉽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내 자식 문제라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데, 아프기까지 하면 신경이 이만저만 곤두선 것이 아닌 소아 보호자를 대하는 것은 상당히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인기 없는 교집합을 가끔 나오는 별종들이 한다. 나 같은.

 

안녕하세요, 소아응급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면 자주 묻는 질문들이 있다.


1)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시나 봐요

아니요. 저 애 안 좋아합니다. 조카도 사실 크게 정 안 줬어요. 조카보다는 저희 집 회색 강아지(성명 : 정알리, 나이 : 만 5세, 베들링턴 테리어)가 더 좋아요. 그냥 소아 보는 일이 생각 외로 잘 맞는 건, 대단한 기술이 있다기보다 꼼꼼하게 묻고 시간 두고 검진하는 아주 클래식한 의학의 영역이 매우 중요한 분야이고 제가 그걸 좋아하기 때문이랍니다.

 

2)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밑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딱히요...? 사명감이랄 게 있을까요. 당신이 회사에서 일이 떨어지면 그 일을 해내려고 최선을 다하듯이 저도 퀘스트가 주어지면 하는 것이랍니다.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 제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아마도 이 분위기면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막내라인일 것 같거든요) 늘 하고 있답니다. 그냥 저는 직장에서는 일 잘하는 게 짱이니까 일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랍니다.


3) 선생님 정도면 엄청 출중하신 분 아니신가요

아니요 전혀요. 논문이라곤 한 줄도 쓰기 싫고, 연구라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 학문의 길을 떠나왔고요, 초음파로 충수돌기염은 껌으로 보고 별 거 별 거 다 초음파로 봐 내시는 선생님들도 많지만 저는 장중첩증 정도만 고작 보는 수준이에요. 중환자를 어쩔 수 없이 좀 보기는 했다지만 제 실력은 고작 하룻밤 그 아이 곁에 버텨주는 것이지 그다음은 제가 할 수 없어서 여기저기 손 벌리고 다닙니다. 좀 잘하는 것이라고는 보호자와 대화하기, 말 안 듣는 애기 옆에서 좀 지켜보면서 시간 벌기, 같이 일하는 동료들 맛있는 거 한 번씩 사주면서 같이 수다 떨면서 푸념하기, 오지랖 부리면서 이 환자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하기, 뭐 그런 것들이에요. 그냥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인데 어쩌다보니 제 주변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점차 멸종되어 가네요.

 

4) 밖에서 개원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돈 못 벌어오는 과라고 구박받거나 이래저래 일하며 짜치는 일들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회사에서 짜치는 게 한두 번은 아닌데 그때마다 사표 쓰고 뛰쳐나가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잖아요. 저도 개원 생각 안 해 본 것 아니고 실제로 그쪽으로도 많이 빠지셨지만 저는 그냥 주는 월급 받으면서 회사 나가고 그 외 시간에는 제가 하고 싶은 일들 하는 삶이 딱 맞는 천상 월급쟁이라서요. 개원하게 되면 정말 그 살림에 매이게 되는 것이 싫어서 말이지요..... 다 제가 알아서 할 자신이 없기도 하고요.

 

어쩌다 보니 소아응급이라는 생소하디 생소한데 유입인구는 없고 소멸위기에 놓인 한국사회 같은 분과를 세부전공으로 하다 보니, 생각 이상으로 심하게 올려치기를 당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봐도 내 주변 선생님들 중에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가게 헌신적이고 아이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누군가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오히려 화가 나기도 한다. 아마 대부분의 용례는 "사명감 없는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떠나서" 등으로 시작하는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사명감 알러지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아픈 아이들 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심지어 그걸로 책을 써내려는 인간이, 사명감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고? 그 의사 안 되겠네. 생각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만 들어보시라. 사명감이란 것이 꼭 그렇게까지 필요한 일인지에 대해서 나도 변명을 좀 해보겠다.

 

이번에 글을 쓰는 김에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한 번 찾아보았다. 그놈의 사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명감.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

 

사전적 의미는 그러했다. 국어사전 같은 건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찾아볼 일이 거의 없어서 그랬나, 오히려 나는 이 단어가 내 생각보다 그리 무거운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조금은 당황했다. 뭐야, 겨우 이런 정도의 말이었어? 그냥 하는 일 잘하고 싶다는 말 아닌가. 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따라가 보자면 사명감이란 거, 별 거 아니네. 내가 그렇게 외쳐 왔던 인생 모토 두 가지 중 하나에 부합한 것 아닌가? ('본업 존잘' 나머지 하나는 '성공한 덕후'다. 아무도 궁금해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돈 받고 하는 내 직업이고, 다 같이 힘든 일터에서 당연히 일은 잘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고기도 2인분씩 파는 세상에서 1인분은 해야 할 것 아닌가. 회사에서 일을 주면 일을 잘해야지 그럼 못 해서 되겠냐고. 일은 잘하고 봐야지. 

 

그런데 세상에서 생각하는 사명감은 이것보다 조금은 더 숭고하고 대단한 것인가 보다. 내가 아니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없고,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아픈 아이들을 구하고 살려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 환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밥 못 먹고 잠 못 자며 몸이 갈려나가고, 월급은 짜고, 일은 많고, 언제나 소송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도 그것 하나로 웃을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뭐 그런 마음을 사명감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특히 2022년 겨울부터 눈에 띄게 심해진 소아응급진료의 붕괴 이후로, 바닥 밑 지하실이 어디인지 모르겠는 요즘 상황에서 더 심해진 느낌이다. 아이들이 밤에 열이 났는데 갈 응급실이 없어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게 되거나, 기껏 찾아간 병원이 소아응급환자 진료가 불가해서 다른 곳을 뺑뺑이를 돌거나 하게 되는 기사들이 뜰 때마다 사명감이 없는 의사들 편한 길을 찾아서 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비난부터 시작한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 따위는 내팽개치고, 편하고 돈 많이 버는 미용이니 통증으로만 다들 몰려서 정말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사명감 있는 의사들이 줄어들어가니, 증원을 해서 채워 넣거나 미용 분야를 의사들이 아닌 사람들도 하게 개방하면 알아서 먹고살 길이 없어서 기어들어 올 것이라고 선동한다.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싶다. 일단, '편하고 돈 많이 버는'이라는 말. 이미 레드오션인 시장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으려면 얼마나 치열한데, 단순히 밖에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 개원하는 병원들이 생기고, 새 기계, 새로운 기술들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일이다. 증원을 한다고 해서 이 험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길까? 아니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선배의사들이 잘 살고, 직업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아야 유입이 될 것이다. 힘들게 살 것이 뻔한 길을 굳이 가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정말 편하고 돈을 많이 버는 길이 있으면, 그 길로 가는 그게 뭐 어떤데? 본인들에게 선택하라고 해도, 박봉에 힘든 일, 필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사고에도 소송에 걸리는 일을 하겠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일을 하겠는가. 개인의 가치관이 어느 쪽에 무게추를 두는가에 따라 다른 일이다. 어디든 각자의 고충이 있고, 각자의 파이는 각자가 챙기는 법이다. 그들을 매도할 이유도 없고, 내가 하는 일을 대단하다고 필요 이상으로 올려쳐댈 필요도 없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절대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짐을 짊어지려 할까 하는 그런 오만하고 무서운 생각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냥, 직업도 팔자라고 어쩌다가 시작한 일인데 해 보니 정 붙고 해 보니까 잘 맞아서 그래서 하는 중이다. 정말 지긋지긋하고 힘들어서 기껏 받은 전임교원 발령까지 마다하고 떠나려다가도 다시 돌아간 이유는 아직까지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로 돈 벌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 하나였다. 일터에서 일 잘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아직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내 자아효능감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하는 것뿐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생긴다면. 혹은 내가 더 이상 이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인생의 방향을 틀 준비를 하며 살고 있다. 아직은 나에게 익숙한 무대가 응급실이고, 내가 대하기 익숙한 것이 어린이와 그들의 보호자들인 사람일 뿐, 세간에서 생각하는 대단하고 거창한 그런 마음은 아니다. 그냥 직장이 소아응급실이고, 직업이 소아응급전문의인 직장인 1이 하는 소아응급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냥, 이게 내 일이니까 하는 것이다. 일이니까 잘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니 대단한 사명감 갖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울 필요도 없다. 인정머리 없는 건조한 인간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냥 이런 사람도 소아응급에 발 담그고 있구나, 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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