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꼬마 Feb 28. 2024

4. 응급실의 오르페우스.

끊임없이 뒤를 돌아봐야 하는 운명.

'하데스타운'이라는 뮤지컬을 참 좋아한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떠난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하세계까지 내려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받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내가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이 엄습하며 뒤를 돌아보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보며 내 직업은 오히려 오르페우스가 그러했듯이 끝없이 뒤를 돌아봐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개는 내가 처음 생각한 답이 맞지만, 언제든지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여지는 갖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응급의학과 의사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생각한 방향이 아예 틀릴 수도 있고, 지금 집중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더 큰 일일 수도 있다. 때로는 누군가 스치듯 한 말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의학적인 근거에 맞게 나의 주관을 갖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보호자의 말이나 숙련된 동료 간호사, 응급구조사들의 의견들은 생각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이리저리 줏대 없이 흔들리라는 것이 아니다. 처음 생각하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판단에 문제가 없었나 점검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내가 생각한 답에 상황들을 거꾸로 끼워 맞추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하기 때문이다. 발은 땅에 붙이고 단단히 서 있되, 귀는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생각 이상으로 그렇게 단서를 잡아내는 일들이 많았다.

 

소아응급 전임의로 근무한 첫날 아침의 환아였다. 7개월 된 환아가 2주째 구토를 간헐적으로 하고, 설사도 한 번씩 해서 왔다. 다른 병원에서 변이 많이 차서 그렇다(소아에서 가장 흔한 구토와 복통의 원인이기는 하다. 아직 덜 자란 장이라, 발열이 동반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변이 쌓이면서 토하거나 복통이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장염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듣고 관장과 수액치료를 몇 번 했다고 하는데 구토를 또 한다고 왔다. 7개월 환아가 스스로 증상을 호소를 할 수가 없으니 복통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장음은 괜찮고 복부 촉진할 때 크게 아파하는 얼굴은 아니고, 설사를 2주 내내 한 것도 아니요 한 번 했다고 하고. 


뭔가 이상했다. 이 구토가 정말 복부 문제일까, 어떻게 접근할까 고민하던 차에 아버지의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뒤집기를 잘하던 아이인데 뒤집기를 반도 못 한다고. 이건 무서운 이야기인데, 발달이 퇴행을 한다고? 대천문을 만져보았다. 12개월까지는 대천문이라고 해서 두개골이 덜 유합 되면서 열린 부분이 있는데, 뇌종양이나 신경계 감염 등으로 뇌압이 상승하면 이 부분이 매우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아뿔싸, 이 탱탱볼 같은 촉감은 뭐람. 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급한 대로 CT를 먼저 촬영했는데 CT에서도 뇌종양으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대개 엄청나게 크지 않으면 CT에서는 잘 안 보인다.) 결론은 뇌종양, 진행이 상당했던. 


한편, 전공의  1년 차 시절 외상 환자들을 보던 중이었다. 초등학생 정도 되는 건강하던 아이가 허리를 다쳐서 재내원을 했다. 전날도 계단에서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다쳤는데, 요추부 골절 소견을 듣고 정형외과 협진 후에 보존적 치료를 하기로 했던 아이였다. 오늘도 계단에서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다쳤다는데, 세게 부딪히거나 넘어진 것도 아니라고 했다. 검진을 해보니 요추부 주변으로 압통이 심하게 동반되어 있었고, 통증은 있었지만 하지 위약감이나 감각 이상 같은 건 없었다. 오케이, 우선 엑스레이를 찍자. 전날에 확인된 골절 외에, 새로 골절이 생긴 부위가 확인되었다. 엑스레이를 보면서 "미끄러진다고 애가 이렇게 뼈가 부러지게 다칠 수가 있나? 아니 부딪힌 것도 아닌데 어떻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수련받던 곳의 외상구역은 숙련된 응급구조사가 함께 일을 했는데, 내 혼잣말을 듣고 그분도 말을 얹었다. "애 뼈가 너무 허여멀건데요 그러고 보니? 아니 뭔 노인 뼈 같아?"


그러니까. 이건 단순하게 '허리를 다쳐서 골절'이라는 상황에 집중하고 일반적으로 응급수술을 요하는 신경학적 증상을 보이거나, 척추뼈의 심한 어긋남이 없는지만 볼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거의 스치기만 해도 뼈가 툭툭 부러지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환아를 다시 진찰하러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고, 최근 컨디션이 나쁘거나 오래 발열이 있거나, 밤에 식은땀이 나거나, 체중이 빠지는 일, 멍이 잘 드는 일, 그런 이상했던 점은 없었다고 했다. 다른 신체검진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칼슘 수치를 포함한 기본적인 혈액검사를 진행해 보고, 이상소견이 있다면 소아청소년과 협진이 필요하겠다는 판단 하에, 보호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골절이 생길만한 기전이 아닌데 이틀 연속 골절이 생겼고, 엑스레이 상에서도 이전 병력 없이 건강하던 아이의 척추인데 골감소증이 동반된 소견이라, 혈액검사 결과를 보고 가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을 적극적으로 조절하면서 보고, 결과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정형외과 협진만 보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보호자분은 많이 불안해하시기는 했지만 다행히 협조적이었다. 어떤 병을 의심하는지 물으셨지만,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을 아꼈다. 어쭙잖게 넘겨짚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았다. 제발 아니었으면 했는데 혈액검사상 백혈구 수치가 지나치게 높았고, 빈혈과 혈소판 수치는 떨어져 있었다. 고칼슘혈증도 동반되어 있어 즉시 수액 속도를 높이고, 소아청소년과와 즉시 협진을 시작했고, 정형외과 측의 의견도 함께 구했다. 정형외과에서는 골절 자체는 MRI를 촬영하고 추가 의견을 주겠지만, 현재 혈액검사 소견에 대해서 소아청소년과와 의논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답변을 주었다. 백혈병. 이렇게 진단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대부분은 발열이 오래 지속되어서 혈액검사를 했다가 우연히 발견되거나, 멍이 자주 들고 피곤해하는 등의 증상으로 처음 의심해서 검사 후에 발견되어 상급병원으로 의뢰되어 받았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당황스러운데 보호자는 오죽할까? 차분히 나쁜 소식을 전하고 소아청소년과 쪽에서 나머지 진료를 진행하며 입원이 결정되었다. 내가 단순히 골절이니 정형외과랑 말해야지, 하고 넘어갔더라면, 아마 두 번째 내원에서도 진단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경험이 있었기에 몇 년 뒤에 비슷한 케이스를 한번 더 겪었을 때는 처음부터 의심을 할 수 있었다.

 

처음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 불편해서 온 주 증상을 '주소'라고 부른다. 이 주소에서 출발하여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되었고 어떤 동반증상이 있었는지 등을 물어보며 정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진단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 주소에만 집중하다 보면 더 큰 문제를 놓치는 일이 있다. 비유가 웃기지만 소주병에 담아 둔 락스를 끝까지 소주라고 믿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수련받던 곳에서는 증상에 따라서 구역을 나눠서 진료를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심장계 증상' '신경계 증상' '외상' 등의 라벨이 붙은 채로 처음 진료를 보다 보니 경험이 적고 미숙하던 시절에는 특히 이것에만 집중하게 되는 함정이 있었다. '경련'이라고 해서 왔는데 자세히 문진을 해보니 경련이 아니라 발열에 따른 오한이었고, 감염이 주된 문제였던 케이스도 많았고, 머리를 다쳐서 왔는데 알고 보니 위장관 출혈이 오래되어서 빈혈이 심해지고, 실신을 하면서 생긴 두피의 열상이었던 케이스도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주소로 와서 안과의 진료를 대기하던 중에 혈압이 급작스럽게 떨어지고, 내원해서 처음 발열이 있었던 환자가 있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알고 보니 클렙시엘라 균 감염으로 인해서 생긴 간농양과, 이것으로 인한 내인성 내안구염이었던 상황. 눈에만 집중했던 나는 생각도 하지 못한 진단이었다. 당직 교수님은 상황을 듣자마자 복부에 초음파를 갖다 대셨고, 초음파에서 보일 정도의 큰 간농양이 보였다. 언제나 환자를 볼 때는 '왜 그럴까'를 생각하고, 내가 뭔가 놓친 것이 없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정말 답이 보이지 않는 환자를 볼 때의 나는 그래서 꽤나 수다스럽다. 내가 볼 때 이 환자는 이러저러해서, 이걸 생각해서 이렇게 처방을 냈는데...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지? 뭘 해봐야 할까? 지금 이 증상만 내가 해결해 주면 되는 게 맞나? 한번 더 돌아보고 고민한다. 그래야 작은 이삭 하나라도 줍는다. 내가 오르페우스였다면, 절대 에우리디케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좋은 의사가 될 자질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렴.

작가의 이전글 3. 삽관은 했는데, 인공호흡기 세팅을 못 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