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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Feb 28. 2024

6. 나중에 본 사람이 명의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까.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학생 때부터도 정말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어떤 병을 진단함에 있어서 자연경과가 어느 정도 확인된 다음에야 답이 나오기 쉽다는 의미다. 생각해 볼까, 막 틔운 싹을 보고 이것이 쌀인지 보리인지 콩인지 아니면 잡초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대가라도 손가락 한 마디도 자라지 않은 새싹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같이 식물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다 자란 다음에 이것이 쌀인지 콩인지 구별하는 정도가 어렵지는 않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의사들이 질병을 진단하는 과정에도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방금, 고작 30분 전에 열이 난 환아고 발열 외에 다른 동반증상이 없다면, 보호자분들이 원하는 '정확한 진단명'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이 바이러스 감염이고, 환아가 건강했고 많이 아파 보이지 않으면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가장 높으나 발열이 2-3일 이상 지속되거나 호흡곤란, 못 먹고 처지는 등의 증상이 있을 시에는 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정확한 진단명도 없이 열만 난다고 하더라,는 설명이 그저 두루뭉술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어쩔 수 없다.


소아응급실 인턴 때 '나중에 본 사람이 명의로구나'라는 걸 정말 절실하게 느꼈다. 이틀 전부터 열이 나기 시작한 두 돌배기 아이, 열 난 당일 소아과에 내원했는데 '단순 발열'이니 해열제만 먹으면 된다고 했으나 열이 안 떨어진다고 응급실에 데려왔다. 아주 흔한 소아응급실의 풍경이다. 소아응급실 인턴 사흘만 해도 아주 지겹도록 보기 시작하는 이야기. 아이를 청진하고 검이경으로 귀를 보고, 구강검진을 하는데 목 안에 물집이 득실득실 잡혀 있었다. 손발에도 수포가 두어 개 보이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 수박도 복숭아도 자두도 제철이지만 수족구병을 일으키는 엔테로바이러스가 아주 기승을 부리는 계절. 오호통재라, 수족구병이로구나. 열은 아직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이는 목이 따가울 텐데 그래도 식욕이 많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물도 좀 먹으려고 하고 소변량은 줄지 않았다. 수족구는 열도 열이지만 목이 따가워서 먹지 못하는 증상이 더 괴로운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추가로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수족구인데요 보호자분, 운을 뗐다.


갑자기 보호자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역시 처음부터 큰 병원 응급실을 갔어야 하는 게 맞나 봐요. 여기서는 선생님이 바로 보자마자 수족구라고 진단을 하잖아, 그런데 거기서는 실컷 물어보고 검진해 놓고는 무슨 병인지 진단도 못 하면서 해열제나 먹으라고 쥐어주고, 진짜 그런 사람들은 뭣도 모르면서 왜 소아과 의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인턴이라는 사실을 보호자가 알았을까 몰랐을까. 잠시 망설였다. 저는 의사 된 지 이제 넉 달밖에 안 되는 인턴 나부랭이....인데요,라고 말을 할까 하다 긁어 부스럼일 느낌이 강하게 와서 굳이 밝히지 않았다. 내가 입은 가운에 적힌 마크가 그리 믿음이 가셨을까. 의사 4개월 차 애송이 인턴과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강호의 고수 소아과 전문의 선생님 중 누가 수족구병을 봐도 더 많이 봤을 것이며 누가 더 그 병을 잘 알까. 하지만 열나자마자 애 데리고 가서 검진을 했을 때, 수족구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입 안의 수포와 손발의 발진들이 없는데 누가 그걸  수족구병이라는 진단명을 바로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수족구병이라고 진단하는 사람이 오히려 거짓말쟁이, 아니면 차라리 점쟁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이가 보호자 말마따나 처음부터 '큰 병원 응급실'에 왔으면 아마 나도 왜 열이 나는지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열 나는 환아들 접근하는 거야, 언제부터 열나고 어떤 동반증상 있고, 주변에 열이 나거나 감기 걸린 사람이 있는지 등의 바이러스 감염력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 그리고 폐음 청진-고막 시진-구강 검진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그때 내가 봤다고 뭘 알겠는가. 마치 영화를 딱 1분 보고 결말을 예측하라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어야 그다음 이야기가 짐작이 가고, 결말이 틀리든 맞든 예측이 될 텐데, 1분을 본 다음에는 이게 무슨 내용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로구나, 나중에 본 사람이 명의라는 말이 그래서 있구나. 그때 깨달았다. 보호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했다.


열이 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원래 많지 않고, 세균성 감염이 의심될만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해열제를 포함한 증상 조절 약제를 쓰고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리고 이제 수족구병이라고 진단이 되기는 하였으나, 이것 역시 바이러스 감염이기에 따로 특효약이 있는 게 아니라, 받아오신 해열제를 먹고 경과를 보는 결정 자체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못 먹는 것이 가장 문젠데 다행히 아이가 어느 정도 먹는 양이 유지가 되어서 경과 보셔도 되겠습니다.


보호자는 여전히 석연치 않는 느낌이었다. 아니, 돈은 돈대로 받아놓고 누구는 바로 진단해 내는 병을 찾지도 못했다고, 그런데 의사들끼리는 좀 그런 식으로 서로 감싸주시나 봐요? 하며 비꼼을 남기고 가셨다.


비슷하게 먼저 본 의사 바보 만드는 병 중 하나가 가와사키병이 있다. 고열이 4-5일 이상 지속되면서 입술의 점막과 결막이 충혈되고, 손발이 붓고, 발진이 돋고 림프절이 커지는 증상들이 보이는 병인데, 애초에 이 병은 진단하는 전제가 발열이 5일 이상 지속될 때, 인데 발열 하루 이틀 만에 진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징적인 동반증상들도 처음부터 다 나타나지도 않고. 처음 열나자마자 간 병원에서 진단을 못 해냈다고 화를 내시는 분들이 제법 있어서 설명을 차분히 드리지만, 잘 이해하셨는지는 의문이다. 소아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성인의 대상포진도  약간 같은 결인데, 신경 다발을 따라서 물집이 올라오면 당연히 진단이 쉽겠지만 이유 없는 두통이나 옆구리 통증 등으로 왔을 때 처음부터 진단해 낼 수 있는 병은 아니다. 한두 번 겪어보고 나면 혹시 귀가 후에 피부에 물집이 올라오거든 대상포진이라고 경고는 해 줄 수 있겠다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피부가 따끔대는 통증이 있다고 바로 속시원히 대상포진이라고는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질병의 씨앗도 싹을 트고 뿌리를 내리고 꽃이 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다. 후향적으로 돌이켜서 보면 진단 못 할 병이 없고, 치료 못 할 병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내가 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왜 이런 것도 못 했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 오만한 일이며, 나의 진료에 대해서 다른 의사들 역시 '왜 이걸 이렇게밖에 진단을 못 해냈나'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늘 생각해야 한다. 최근 아주 많이 발생하는 의료소송들에 관련해서, '왜 이런 식으로 했냐'는 질타 섞인 기사들을 많이 보는데, 그 당시에 본 의사가 아니라면 정말 함부로 말을 얹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답을 알고 난 다음에 문제를 다시 보면 정답으로 가는 길이 명백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일은 하나하나 어둠 속에서 불을 밝혀 길을 찾아나가는 일이기에, 그 당시의 판단이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걸 전제하고 접근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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