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3] 너를 품에 안으면 [27장-1부] — ‘사건’이 아니라, 지시였다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7-1)
아사드의 전화가 끊긴 뒤, 선율의 집은 더 조용해졌다.
조용한데 머릿속은 오히려 더 시끄러웠다.
공조 요청.
캄보디아 콤파운드.
영사관 사칭 라인.
단어들은 다 따로 떨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한 군데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선율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예전 콤파운드 사건은 투자사기였다.
한국 영사관을 사칭하고, 공문처럼 보이는 문장을 만들고,
사람을 안심시키는 말투까지 짜 맞춰서
끝내는 피해자 스스로 돈을 보내게 만들던 라인.
지금 건은 겉으로만 보면 전혀 달랐다.
투자도 아니고, 공문도 아니고, 영사관도 아니었다.
지금 퍼지고 있는 건 고다인을 둘러싼 가짜 영상과 사진이었다.
그런데 선율은 그 차이보다 먼저, 묘하게 닮은 지점을 느꼈다.
둘 다 진짜를 훔치는 일이었다.
목소리를 훔치고, 얼굴을 훔치고, 신뢰를 훔치고,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심보다 믿음을 먼저 선택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영사관 이름을 빌렸고,
지금 또다시 연예인의 얼굴을 빌렸다.
간판만 바뀌었을 뿐,
사람을 속이는 구조 자체는 비슷했다.
선율의 눈빛이 서서히 굳었다.
이게 단순한 악성 유포면 오히려 쉬웠다.
자극적인 조작, 관심 끌기, 악의적인 확산.
그 정도라면 선은 분명했다.
그런데 아사드는 캄보디아 콤파운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선율은 몇 달 전 자신이 맡았던 최윤서 투자 사기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도 결국 돈을 끌어모으는 일이었다.
다만 방식이 달랐다.
최윤서라는 얼굴과 이름을 앞세워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의심보다 기대를 먼저 품게 만든 뒤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게 만드는 구조였다.
말을 설계하고,
불안을 읽고,
의심을 지운 뒤,
피해자 스스로 믿게 만드는 방식.
선율은 턱을 문질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때는 투자라는 말로 사람을 흔들었고,
지금은 고다인의 얼굴로 사람들의 판단을 흔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모양은 달랐지만,
누군가의 이름과 얼굴을 빌려 신뢰를 조작한다는 점에서는
이상할 만큼 결이 닮아 있었다.
최윤서 사건과 이번 유포 건이 정말 무관한 걸까.
그 의문이 스치는 순간,
선율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가능성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혹시 이번 일도,
그때 그 판과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선율이는 캄보디아 콤파운드 냄새가 겹친다는 아사드의 말이 자꾸 걸렸다.
누군가 장난처럼 영상을 만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을 무너뜨리는 법을 아는 쪽에서 손을 댄 거라면
선율은 그제야 고다인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름이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이름을 도구처럼 쓰고 있을 가능성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선율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어들이 서로 얽히기만 할 뿐,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선율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순간 다시 주저앉았다.
앉은 게 아니었다.
잠깐, 거기에 내려놓인 사람 같았다.
손바닥이 또 차가웠다.
선율은 손을 문질렀다.
문지르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때 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저장된 번호였다.
휴대폰 화면에 ‘캡틴’이라는 콜러 아이디가 떴다.
선율은 한 박자 늦게 전화를 받았다.
자기조차 그 한 박자를 의식했다.
그래서 더 서둘러 목소리를 정리했다.
선율: “네, 캡틴.”
캡틴(전화): “로버트. 지금 어디야?”
선율: “집입니다.”
캡틴(전화): “지금 상태 어떠냐? 바로 나와야겠다.”
선율은 잠깐 멈췄다.
캡틴(전화): “지금 당장 사무실로 와.”
대답하려는 순간 입안이 바짝 말랐다.
선율은 먼저 침을 한 번 삼켰다.
선율: “네.”
캡틴(전화): “그리고 로버트.”
캡틴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캡틴(전화): “이건 잡담 아니야. 연방에서 바로 내려온 건이다.”
그 말에 선율의 등이 저절로 곧아졌다.
선율: “알겠습니다.”
캡틴(전화): “들어오기 전에 뭐라도 먹고 와.
와서는 정신 못 차린 얼굴 보이지 마.”
선율은 잠깐 숨을 멈췄다.
보였나.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캡틴이 다시 말했다.
캡틴(전화): “한 시간 안에 들어와. 늦으면 내가 직접 챙긴다.”
뚝.
통화가 끊겼다.
선율은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지금 놓아버리면 몸이 먼저 흔들릴 것 같았다.
그는 신발을 신다가 잠깐 멈췄다.
끈을 묶는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그는 익숙한 이유로 덮었다.
피곤해서.
늘 가장 먼저 꺼내는 변명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시야가 얇게 한 번 흔들렸다.
방이 흔들린 게 아니라 눈이 흔들린 것이었다.
선율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잠깐 고개를 숙였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선율은 가슴 안쪽의 흔들림을 억지로 눌렀다.
괜찮아.
정상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은 뒤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고, 집 앞에 세워 둔 차까지
가는 짧은 거리도 오늘은 멀게 느껴졌다.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자, 선율은 잠깐 핸들을 쥔 채 숨만 골랐다.
생각은 자꾸 다른 쪽으로 튀었지만, 그는 끝내 시동을 걸었다.
경찰서까지 가는 길은 익숙했다.
그래서 더 무심했고, 더 버티기 쉬웠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형광등의 빛이 먼저 내려앉았다.
그 빛 아래에서는 사람 표정도 감정도 한층 더 차갑게 굳어 보였다.
선율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사드는 이미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아사드의 눈이 선율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아사드: “야.
너, 진짜 괜찮냐?”
선율: “괜찮아.”
아사드는 대답 대신 파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에는 한 줄이 찍혀 있었다.
INTERNATIONAL ASSISTANCE REQUEST
선율의 눈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이해가 되기 전에 목부터 굳었다.
아사드가 낮게 말했다.
아사드: “온다더니 진짜 바로 왔네.”
그때 문이 열렸다.
캡틴이 들어왔다.
캡틴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는 순간 이건 일이 아니라 대화가 되어 버리니까.
캡틴: “앉아.”
선율과 아사드는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캡틴은 파일 위를 손가락으로 툭, 툭 두드렸다.
캡틴: “한국에서 넘어온 건이다. 연예인 사칭, 딥페이크 유포.”
캡틴은 잠깐 멈췄다가 마지막 단어를 더 천천히 꺼냈다.
캡틴: “그리고 영사관 사칭 라인.”
선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캡틴: “다시 말하지만 이번 건 연방 쪽에서 직접 내려온 거다.”
우리가 전에 들여다봤던 콤파운드 계정들을 기억하지.”
아사드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드: “네.”
아사드: “피해자들한테 공식 기관인 척 접근하던 그 방식 말씀하시는 거죠.”
캡틴: “그래.”
이번 것도 냄새가 비슷해.
처음 보면 그냥 연예인 사건처럼 보여.
그런데 이번엔 돈만 보고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야.
연예인 사건은 미끼고, 진짜 목적은 그다음이다.”
선율은 묻지도 못했는데, 캡틴은 이미 다음 말을 꺼내고 있었다.
캡틴: “한국에서 넘어온 이름이 있다.”
캡틴: “고다인.”
그 이름이 나오자 선율의 입안이 다시 바짝 말랐다.
캡틴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캡틴: “표정 관리해.”
선율: “죄송합니다.”
캡틴: “사과하지 마.
사과할 시간에 업무로 바꿔.”
캡틴은 파일을 선율 쪽으로 밀었다.
캡틴: “담당은 너다.”
선율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선율: “왜 저입니까?”
캡틴이 선율을 가만히 쳐다봤다.
눈이 얇아졌다.
질문을 들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설명까지 시켜야 하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캡틴: “왜냐고?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냐?”
선율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캡틴: “너 왜 이래?”
캡틴: “너 한국말 못 해?”
아사드가 옆에서 숨을 삼켰다.
말리려는 숨이 아니라 같이 긴장한 숨이었다.
캡틴: “너 그 라인 담당이잖아.
영사관 사칭 쪽이 맞았었잖아. 최윤서 사건도 그랬고...
연방에서도 그 이유로 너 찍어서 내려보낸 거고.”
선율이 낮게 말했다.
선율: “네.”
캡틴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낮아질수록 오히려 더 위험했다.
캡틴: “내가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하냐?”
머리 아직도 정리 안 됐으면 지금 말해.
나중에 가서 내 혈압 올리지 말고.”
선율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곧장 손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캡틴: “할 수 있어, 없어.”
캡틴: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해.”
선율은 목을 한 번 삼켰다.
선율: “할 수 있습니다.”
캡틴: “좋아.”
캡틴: “그럼 지금부터 진짜 할 수 있는 사람처럼 움직여.”
선율은 파일을 넘겼다.
첫 페이지에는 요약이 적혀 있었다.
피해자: 고다인 (KOR)
범죄 유형: 사칭 / 딥페이크 / 유포 / 협박 가능성
연결 혐의: 해외 사기 조직(캄보디아 콤파운드) 연관 가능
요청 사항: 플랫폼 로그 / 서버 협조 / 계정 추적 / 해외 공조
선율은 문장을 따라 읽다가 어느 한 줄에서 시선이 멈췄다.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놓친 것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줄을 다시 짚었다.
캡틴: “소리 내서 읽어.”
캡틴: “지금.”
선율: “읽고 있습니다.”
캡틴: “그럼 답도 해.”
캡틴: “이거 맡을 수 있나?”
선율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선율: “네, 가능합니다.”
아사드가 옆에서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사드: “로버트…”
캡틴이 바로 잘랐다.
캡틴: “빠지는 선택지는 없다.
이건 개인 문제가 아니야. 이미 공식 절차 들어갔어.”
공식...
그 단어 하나가 선율의 머릿속을 잠깐 정리해 주는 것 같았다.
정리된 것이 아니라, 정리됐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캡틴: “한국 쪽에서 오늘 밤에 추가 자료를 더 보내준다.
그전에 너는 이쪽 로그부터 뽑아.
혹시모르니 콤파운드 계정들, 예전 패턴이랑 다시 대조하고.”
캡틴은 말을 멈추고 선율을 똑바로 바라봤다.
캡틴: “그리고 너.
상태가 이상하면 바로 말해.”
선율의 대답은 또 한 박자 늦었다.
선율: “괜찮습니다.”
캡틴: “좋아. 그럼 오늘 길게 간다.”
아사드가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사드: “야, 로버트.”
아사드: “너 지금 손…”
선율은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더 깊이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떨림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아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처럼.
캡틴이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캡틴: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한국 쪽이 가장 원하는 건 하나다.”
유출 시작점.
맨 처음 올린 놈.”
그 하나만 잡아도 줄줄이 나온다.”
그 순간, 선율의 폰이 진동했다.
윤서.
화면을 보는 순간 선율의 손이 멈췄다.
아사드도 그걸 봤다.
아사드의 시선이 곧장 선율의 얼굴로 올라왔다.
아사드: “누구냐?”
선율은 폰을 뒤집어버렸다.
선율: “아무것도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선율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선율은 아직 몰랐다.
이 공조 사건이 윤서를 덮어주는 길이 아니라,
윤서가 선율을 더 깊이 끌고 들어가는 새로운 통로가 되고 있다는 걸.
눈앞이 다시 한 번 아주 얇게 흔들렸다.
선율은 잠깐 눈을 감았다.
고작 몇 초, 머릿속 소음을 밀어내려는 짧은 버티기였다.
그런데 눈을 뜨자 화면 오른쪽 아래 시간이 아까 봤던 것보다 몇 분이나 앞서 있었다.
마우스는 이미 움직인 뒤였고, 로그 창 하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열려 있었다.
선율은 그대로 화면을 바라봤다.
내가 이걸 언제 열었지?
목 뒤가 서늘해졌다.
아사드가 낮게 불렀다.
아사드: “로버트.”
선율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캡틴이 말했다.
캡틴: “지금부터 기록해.
사건만 말고, 너 상태도 같이 기록해.”
선율의 목이 한 번 잠겼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율: “네.”
그때 폰이 다시 진동했다.
윤서.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신 경사님, 다인이가 지금 잠깐 가능하다고 해요. 정말 짧게요.
선율은 그 문장을 내려다봤다.
짧게.
그 말이 더 위험하다는 걸 선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짧게만 보겠다고 해 놓고, 제대로 끊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PART 2/3] 너를 품에 안으면 [27장-2부] — 공식 발표, 비공식 붕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7-2)
서울.
윤아는 기자들보다 먼저 문장을 골랐다.
이럴 때는 말이 먼저 나가야 했다.
문장이 곧 방패가 되니까.
매니저, 기획사 실무자, 변호사가 거실에 모여 있었다.
바닥에는 서류와 태블릿이 널려 있었다.
링크 목록, 캡처본, 계정 정리표, 업로드 시간대까지.
누가 봐도 이미 일이 커질 대로 커졌다는 게 보였다.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매니저: “누나, 입장문은 이 방향으로 가는 게 제일 안전해요.
건강상 이유로 휴식. 법적 대응 진행. 추측성 보도 자제 요청.”
변호사가 옆에서 말을 받았다.
변호사: “거기에 한 줄만 더 넣죠.”
허위 영상과 사진 유포는 명백한 범죄고,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요.
말은 최대한 아끼되, 칼은 들고 있다는 건 보여줘야 합니다.”
윤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문을 읽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문장이 아니었다.
계속 딸 얼굴만 떠올랐다.
다인은 방 안에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닫힌 건 문이 아니라 세계 같았다.
윤아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다인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후드 끈을 끝까지 조여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윤아: “다인아.”
다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윤아: “오늘… 공식적으로는 잠깐 쉬는 걸로 발표할 거야.
건강 때문에 쉬는 걸로 하고, 유포한 쪽은 법적으로 대응할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다인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다인: “건강 때문에...?
엄마는 늘 그래.
맨날 문장으로 덮잖아.”
윤아의 목이 잠깐 메었다.
윤아: “덮자는 게 아니야.
지금은 널 지키고...네가 더 다치지 않게 하려는 거야.”
그 말에 다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울어서가 아니라, 오래 못 자서 빨개진 눈이었다.
다인: “지킨다고?
엄마가 날 지킨 적이 있었어?”
윤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다인: “나 어릴 때부터 하기 싫다고 했잖아.
무대도 싫고, 카메라도 싫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다고.
계속 말했잖아.”
윤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는 그게 정말 싫다는 뜻이었는지,
그냥 어리니까 겁내는 거라고 착각한 건지,
이제 와서 따지는 것 자체가 너무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인은 멈추지 않았다.
다인: “근데 엄마는 왜 나를 연예인으로 만들었어?
이렇게 될 거면서.
이렇게까지 망가질 거면서.
나 이런 식으로 찢어질 거면서.”
윤아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윤아: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
다인이 비틀듯 웃었다.
다인: “엄마는 항상 그랬어.
다인이는 잘할 거야.
다인이는 해낼 거야.
근데 난 한 번도 잘하고 싶다고 한 적 없어.
엄마가 보고 싶은 딸이 있었던 거지.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없었고.”
윤아의 눈가가 젖었다.
울음보다 피로가 먼저 차오르는 얼굴이었다.
윤아: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다인: “지금 와서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
나 이제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그냥 나로 안 보잖아.”
가짜를 진짜처럼 믿고 보잖아.
그 얼굴이 내 얼굴이라고 믿잖아.”
윤아는 다인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윤아: “그건 네가 감당할 일이 아니야.
증명은 엄마가 할 거고, 경찰이 할 거고, 변호사가 할 거야.”
너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돼.”
다인은 손을 빼지 않았다.
그렇다고 잡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잡힌 손이 아니라, 그냥 놓지 않고 버티는 손 같았다.
다인: “엄마.”
그럼 엄마는 또 이번에도…
말로 넘길 거야?”
윤아는 대답 대신 다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도 손끝에 닿는 피부가 이상하게 뜨거웠다.
윤아: “말로는 안 돼.”
나도 그건 알아.
그래서 이번에는 꼭 잡을 거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누군지.
왜 하필 너였는지.”
그때 거실 쪽에서 매니저가 문을 두드렸다.
매니저: “누나.”
입장문 지금 배포에 들어가요.
기자들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윤아: “응. 내보내.”
매니저는 짧게 대답하고 문을 닫았다.
잠깐의 정적 뒤에 다인이 낮게 말했다.
다인: “결국 발표부터 하네.
엄마는 늘 그게 먼저였어.”
윤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서 자기가 흔들리면, 다인은 더 깊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윤아: “아니...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윤아는 다인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배우가 아니라, 다인 엄마로.
두 손으로 딸의 손을 감싸쥐었다.
윤아: “엄마가 잘못했어.
그건 인정할게.
그래도 지금 엄마가 하려는 건 하나뿐이야.
너를 여기서 빼내는 일이야.
이 판에서 제일 먼저 너부터 꺼내는 일이야.”
다인의 눈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는데,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다인: “엄마…
나 진짜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 말에 윤아의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숨으로 겨우 눌렀다.
윤아: “그래, 그만해.
그만해도 돼.
당연히 그만해도 돼.
지금은 쉬어.”
나머지는 엄마가 할게.”
엄마가 끝낼게.”
그 말이 끝나자 다인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울음이 터지는 게 아니라, 꺼져버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밖에서는 공식 입장문이 배포됐다.
[소속사 공식 입장]
“고다인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잠정 휴식에 들어갑니다.
또한 허위 영상 및 사진 유포에 대해 법적 대응을 진행 중이며,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휴식’이라는 단어 하나로 잠깐 조용해졌다.
하지만 집 안은
오히려 그때부터 더 시끄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PART 3/3] 너를 품에 안으면 [27장-3부] — 익숙해진 화면, 늦게 도착하는 절차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7-3)
한국의 다인이는 불타고 있었다.
가짜 영상이 퍼지고, 기자들이 몰려들고,
신문식 기자회견이 뜨고, 악플이 쏟아졌다.
그 불길 속에서—진짜 다인이는 숨을 못 쉬었다.
미국의 다인이는 조용히 굳어가고 있었다.
그 ‘다인’은 윤서가 만든 가짜였고,
한국의 진짜가 타들어가는 동안에도 정반대로
여유롭게 웃으며 선율을 유혹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불길은 늘 먼저 번진다.
그리고 절차는 늘 나중에 도착한다.
선율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인쇄된 글자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읽었는데,
읽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엔 한 번이었다.
그다음은 “필요할 때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필요가 아니라 습관이 됐다.
한국에서 파일이 하나 올라오면,
미국에선 메일이 하나 늦게 도착했고,
그 늦게 도착한 공백을 메우는 건
항상 같은 화면이었다.
영상통화.
선율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이건 수사를 위한 연락이다.”
“피해자 보호 차원이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한 체크다.”
그 말은 처음엔 맞았다.
하지만 “맞았던 말”은 시간이 지나면 핑계가 되기도 했다.
통화는 벌써 여러 번이었다.
서로 얼굴을 보는 각도도 익숙해졌고,
어떤 날은 인사도 짧아졌다.
처음엔 용건이 먼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연결되는 것 자체가 먼저가 됐다.
다인(윤서): “아저씨, 오늘도 늦으셨네요.”
선율: “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다인(윤서): “아저씨, 식사는 하셨어요?”
선율: “네. 방금 대충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늘 경사님이었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고, 서로의 거리를 지키는 호칭이었다.
선율은 그게 편했다.
그 호칭 안에서는 적어도 어디까지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경사님은 아저씨가 됐다.
처음에는 잠깐 튀어나온 실수처럼 들렸지만,
한 번 바뀐 호칭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율도 처음에는 그 말이 걸렸지만, 자꾸 듣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을 넘는 일은 대개 그렇게, 알아차리기도 전에 시작됐다.
어느 날은 통화가 길어졌다.
한국에선 또 기사 하나가 떴고,
댓글 캡처가 파일로 도착했고,
그걸 읽는 선율의 눈이 지쳐 있었다.
그날 화면 속 그녀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웃지도 않았다.
말도 빨리 하지 않았다.
잠깐 숨을 고르고,
망설임을 눈으로 먼저 보여준 뒤에
다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인(윤서): “아저씨.”
선율: “네.”
다인(윤서): “저…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선율: “뭔데요.”
다인은 바로 말하지 않았다.
잠깐 화면 밖을 봤다가, 다시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 머뭇거림이 너무 사람 같아서
선율은 괜히 더 대답을 기다리게 됐다.
다인(윤서): “아저씨는…
저한테 왜 계속 존댓말 하세요?”
선율의 손이 잠깐 멈췄다.
선율: “갑자기 그건 왜요.”
다인(윤서): “그냥요…”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계속 저 혼자만 어려 보이고, 더 멀게 느껴져요.”
선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다인은 괜히 눈을 한 번 내리깔았다가, 다시 천천히 올려다봤다.
다인(윤서): “저 지금 무서워요.”
계속 이상한 일만 생기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아저씨까지 저한테 그렇게 선을 두시면…
저 진짜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요.”
선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선율: “선을 좀 두는 게 맞으니까요.”
다인(윤서): “알아요.”
그래도 아저씨는 저를 사건으로만 보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저한테만이라도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안 하시면 안 돼요?”
그 말은 떼를 쓰는 투정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고, 더 상처받은 사람처럼 들렸다.
그래서 선율은 더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선을 넘는 사람은 늘 대놓고 들어오지 않았다.
대부분은 허락부터 구했다.
조심스럽게, 미안한 얼굴로, 여기까지만 괜찮냐고 먼저 물었다.
그게 더 위험했다.
선율은 잠깐 입술을 눌렀다가 낮게 말했다.
선율: “…
알았어.
근데 너무 기대지는 마.”
다인은 바로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 확인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선율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대답했다.
다인(윤서): “네,
알겠어요, 아저씨.”
그 짧은 대답 하나가
둘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거리를
아주 조금 바꿔 놓았다.
선율은 대꾸 대신
모니터 속 한국 파일 목록을 다시 내려다봤다.
유포 경로.
확산 캡처.
편집 흔적.
그리고 그 아래로,
숫자나 증거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이어졌다.
댓글 캡처.
기사 헤드라인.
‘진실’이 아니라 ‘분위기’로 사람을 찢어 놓는 문장들.
선율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시선을 떼었다.
분명 읽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제대로 읽히지 않은 것 같았다.
담당자에게 보낸 요청은 아직 “대기”였고,
승인은 “진행 중”이었고,
반려된 문서는 “수정 요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요청은 “왔고,”
승인은 “기다려야 했고,”
절차는 “완성돼야 했고,”
형식은 “맞아야 했고,”
서명은 “다시 받아야 했고,”
누락이 있으면 “반려됐다.”
시차는 모든 걸 하루씩 늦췄다.
담당자가 바뀌면, 같은 설명을 다시 해야 했다.
“이 계정이 언제 생성됐는지?”
“영상이 처음 유포된 정확한 시각이 언제인지?”
“어떤 플랫폼에서 어떤 링크로 퍼졌는지.”
“원본 파일이 있는지?”
“피해자가 제공할 수 있는 로그는 무엇인가?”
말을 반복할수록 선율은 더 피곤해졌다.
피곤해질수록, 말은 더 건조해졌다.
한 번씩은 그가 스스로도 이상했다.
“지금 내가 돕는 건 사람인가, 종이인가?”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목 뒤가 자꾸 뻣뻣해졌다.
그날도 커피가 식었다.
컵 속 액체는 여전히 진했는데,
머리는 점점 흐려졌다.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귀 안쪽에서 뭔가가 울렸다.
소리도 아닌데 소리 같았다.
그때, 영상통화 화면 속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다인(윤서): “아저씨… 지금도 그거 보고 계셨어요?”
선율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선율: “응. 또 올라왔더라.”
그 순간 선율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는 그걸 깨닫고도 고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손해졌다.
다인(윤서): “네… 방금 또 올라왔어요.
사람들이 진짜처럼 말하잖아요.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아는 척하면서요.”
선율은 화면에서 잠깐 눈을 떼었다.
선율: “엄마랑 얘기했어?”
화면 속 그녀가 눈을 내렸다.
다인(윤서): “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항상 ‘대응’ 얘기만 해요.
변호사, 기사, 회사, 이미지.
다들 저를 위한다고 말하는데—”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다인(윤서): “이상하게 하나도…
저를 위하는 것 같지 않아요.”
선율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선율: “그럴 수도 있지. 다들 급하니까.”
다인(윤서): “알아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녀가 카메라를 똑바로 봤다.
눈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 수줍은 사람처럼.
다인(윤서): “아저씨는 이상하게…”
저를 지켜주는 느낌이 나요.”
선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율: “내가 뭘 했다고?”
다인(윤서): “먼 미국에 있으면서도…
제 사건을 ‘진짜 사건’으로 봐 주잖아요.”
사람들이 다 저를 이미지로 자르는데, 아저씨는…”
‘사람’으로 보고 계시잖아요.”
그 말이 부드러웠고,
부드러운 말은 피곤한 사람에게 너무 위험했다.
선율은 본능적으로 선을 그으려 했다.
선율: “난 경찰이야. 내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일”이라는 단어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다인(윤서): “맞아요. ‘일’이죠.
그래서…
더 믿고 싶은 거예요.”
선율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몸이 뻣뻣했다.
선율: “믿고 싶다, 그런 말 하지 마.”
화면 속 그녀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더 현실적이었다.
가짜는 보통 너무 빠르게 말한다.
그런데 그녀는—
기다렸다.
조용히 숨을 들이켜고,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다인(윤서): “죄송해요.
제가… 자꾸 기대는 말만 해서요.”
선율이 말끝을 삼켰다.
선율: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다인(윤서): “아니에요. 알아요.
아저씨는…
누가 기대면 더 힘들어지는 사람인 거.”
그녀가 그걸 정확히 찌르는 순간,
선율은 잠깐 머리가 멎었다.
왜냐하면—
그건 “다인이”가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었다.
그건
선율이 무너지는 방식이었다.
선율: … “너 지금 왜 그런 말을 해?”
다인(윤서): “그냥…
그런 것 같아서요.”
그녀가 웃었는데,
오늘의 웃음은 크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웠다.
다인(윤서): “아저씨...”
저 사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요.
오늘은…
아저씨 목소리 듣고 싶었어요.”
그 한 줄이
훅 들이대는 게 아니라,
“조금씩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들어왔다.
그게 제일 위험했다.
선율은 모니터 속 한국 파일 목록을 다시 봤다.
절차는 계속 늘어지고,
성과는 잘 안 보이고,
시간은 사람을 먼저 깎아먹었다.
그리고 화면 속 “다인”은
그 깎인 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인(윤서): “제가 아저씨한테 미안한 게 있어요.”
선율: “뭔데?”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망설임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다인(윤서): “저… 가끔,
아저씨가 저 때문에 더 힘들어지는 거 알면서도,
아저씨가 계속 저를 잡고 있어 주시면…
그게… 고마워서요.”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을 아주 낮게.
다인(윤서): “혼자 있으면… 무너질 것 같거든요.”
선율은 대답을 못 했다.
그는 모니터 속 “공조수사” 문서를 다시 봤다.
정식 절차.
승인 대기.
반려.
재요청.
그 문서들은
그를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화면 속 목소리는
그를 살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끝이었다.
선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선율: “나… 지금 좀 이상해.”
화면 속 그녀가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다인(윤서): “네?”
다인(윤서): “아저씨, 괜찮아요?”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더 낮게 말했다.
다인(윤서): “그럼 오늘은 제가 옆에 있어 드릴까요?”
통화가 끝났다.
화면이 검게 꺼지고,
자기 얼굴만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는데—
조용함이 편하지 않았다.
선율은 한동안 꺼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니터에 남은 열이
마치 누군가의 체온처럼 느껴져서.
그는 책상 위 서류를 다시 봤다.
글자들이 종이에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방금 들었던 목소리가 계속 재생됐다.
“오늘은 제가 옆에 있어도 되죠?”
선율은 웃지도 못하고,
화도 내지 못했다.
그냥—
멍했다.
피로는 늘 그렇게 왔다.
눈꺼풀부터가 아니라
판단부터 먼저 무너뜨렸다.
모니터 오른쪽 아래가 또 깜빡였다.
새 메일.
선율은 자동처럼 클릭했다.
한국 측 추가 요청.
첨부 파일 2개.
추가 확인 사항.
요청 마감 시간.
그리고 마지막 줄.
“긴급.”
선율은 그 단어를 읽었는데,
의미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문질렀다.
손이 차가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선율: … 아—, 씨발.”
입 밖으로 나간 욕이
자기 귀에 낯설게 들렸다.
그는 커피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속이 이미 비어 있는데
카페인을 더 넣으면
심장만 먼저 미쳐 버릴 것 같아서.
숨이 얕아졌다.
얕아진 숨이
더 얕아졌다.
그는 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괜히 창문 쪽으로 갔다.
괜히 커튼을 만졌다.
뭐라도 “정상적인 행동”을 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안 했다.
눈앞이 아주 잠깐—
흰 종이처럼 번졌다.
선율은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이 벽에 닿는 감각이
느리게 들어왔다.
선율: … “괜찮아...”
말이 먼저 나왔는데,
그 말이 누구에게 하는 건지
자기 자신도 몰랐다.
폰이 다시 진동했다.
알림이었다.
다인에게서 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율의 심장이 한 번 더 크게 뛰었다.
몸이 먼저 기대고,
머리가 뒤늦게 부정했다.
그는 폰을 들었다가 뒤집어 놓았다.
화면을 가렸다.
가리면,
좀 덜 흔들릴 줄 알았다.
그때였다.
모니터에 떠 있던 한국 파일 목록이
시야 끝에서 흔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부 “하나의 얼굴”처럼 보였다.
고다인의 얼굴.
그 얼굴 위로
유포 영상의 자막들이 겹쳐졌다.
선율은 눈을 크게 떴다.
선율: … “아니야.”
하지만 화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파일이었다.
문서였다.
절차였다.
그런데 그 절차는
사람을 살릴 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선율은 책상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숨이 막혔다.
그는 한 발을 옮기려다가
무릎이 먼저 꺾였다.
바닥이 가까워졌다.
그게 이상했다.
몸이 쓰러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선율은 마지막으로
책상 위의 메일 제목을 봤다.
“추가 자료 요청(긴급).”
그리고
그 아래에 깜빡이는 시간.
마감까지 남은 시간.
그 숫자가
이상하게—
자기 심장 박동이랑 겹쳤다.
뛰고,
뛰고,
뛰다가—
머리가 툭—하고 꺾이는 느낌.
이번에도 잠든 게 아니었고,
잠들기엔 너무 갑자기였다.
방이 한 번 꺼졌다 다시 밝아졌다.
이번엔 처음보다 더 강렬하게...
툭.
선율의 시야가 꺼졌다.
—다음: 28장-1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