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by 스팅비 StinGBee

[PART 1/3] 너를 품에 안으면 [25장-1부]연결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5-1)

연결음이 시작되자마자—선율의 집이 더 조용해졌다.

혼자 있는 집은 전화 한 통이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선율: “Hello, this is Robert.”

(자막: 여보세요, 로버트 신입니다.)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이 “울음을 삼키는 시간”처럼 들려서 더 사람 같았다.


다인(윤서의 목소리): “여… 여보세요…”


선율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은 ‘수사 통화’가 아니라, 스스로 ‘안정 확인’이라고 정했다.

그런 규정이… 오늘은 너무 쉽게 내려졌다.


선율: “다인 씨, 안녕하세요. 저는 신선율 경사입니다.”

“아시겠지만… 다인 씨 어머니 친구분 최윤서 씨를 통해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인 씨가 지금 많이 불안해한다고 해서,

잠깐이라도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001.png

윤서의 집은

거실이 집이 아니라 작은 촬영장이었다.
조명은 이미 완벽하게 각을 잡고 있었고,

벽면과 배경, 카메라 동선까지 빈틈없이 세팅돼 있었다.
주방 간접등만 은은하게 살아 있어 공간 전체가 더 현실 같았다.


동현은 고성능 컴퓨터와 노트북 앞에 앉아 마지막 화면을 점검했다.

싱크, 음성, 조명, 타이머.
손끝엔 망설임이 없었다.

윤서는 그걸 믿었다.
동현의 실력이 여기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대범했다.
윤서는 윤서로 서 있지 않았다.
다인처럼 눈을 두고, 다인처럼 숨을 고르고, 다인처럼 말했다.

너무 잘 만든 가짜는 오히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다.

타이머가 작동하자 동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00:00


동현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입 모양으로만 윤서에게 말했다.


“짧게… 짧게…”


윤서는 고개만 아주 작게 끄덕였다.

숨을 들이마시고—내쉬면서 먼저 흔들었다.

말보다 숨이 먼저 무너지면, 사람은 그걸 믿는다.

선율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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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 “먼저 말씀드릴게요.

오늘 통화는 신문조사나 정식 수사 아닙니다.”

“지금은 최대한 안정 취하시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다인(윤서): “…아, 네에.”

“안 그래도 엄마 친구분이…

한국계 경찰분이 전화 올 거라고…

꼭 받아보라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율: “네. 잘 받으셨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오늘은 정말로… 상태 확인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저는 변호사가 아니라서 법률 조언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 부분만 참고해 주세요.”

“다만 지금 당장 불안을 줄이는

방향으로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윤서의 집

동현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가 원하는 문장들이

선율이 입에서 스스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현은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숨소리만 새도 끝이라서.


타이머가 올라갔다.


00:45


윤서는 일부러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연’이 아니라 ‘망설임’처럼 들리게.

그게 사람을 안심시킨다.


선율의 집

선율: “좋아요. 숨부터 천천히 쉬어볼까요?”

“들이마시고… 내쉬고. 괜찮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숨이 한 번 흔들렸다.)

선율: “지금 계신 곳은 안전한가요?”

“문 잠겨 있고… 주변에 누군가 있나요?”


다인(윤서): “매니저가… 밖에 있어요.”

“근데… 지금은 저 혼자 있는 것 같아요.”


선율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문장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들어왔다.


선율: “지금 혼자 버티는 게 제일 힘드실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통화가 됐고, 그걸로 오늘은 충분합니다.”

“오늘은 사건 이야기보다 지금은 다인 씨 상태가 먼저예요.”


윤서의 집

동현이 타이머를 흘끗 봤다.


01:30


동현(속삭임): “누나… 너무 길게 가지 마…”


윤서는 시선만 내리깔았다.

아직.

조금만 더...


윤서의 손끝이 아주 살짝 떨렸다.

그 떨림을 숨으로 감췄다.

배우는 떨림을 숨기지 않는다. 떨림을 연기처럼 쓴다.


다인(윤서): “… 저, 사람들이… 믿질 않아요.”


선율: “지금은 그걸 다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다인 씨가 감당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숨만 고르셔도 됩니다.”


다인(윤서): “(숨) …네…”


선율: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윤서의 집

동현이 윤서를 쳐다봤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그 말이 너무 사람을 붙잡는 말처럼 들렸다.


동현(속삭임): “누나… 지금 저 말… 진짜—”


윤서는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쉿—.


타이머.


03:00


동현이 입모양으로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윤서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마지막은 한 번만.

그 한 번이 다음 화를 만든다.


윤서가 마지막으로 말을 꺼냈다.

다인(윤서): “… 감사합니다.”

“저… 진짜… 무서웠거든요.”


선율은 목이 잠깐 메었다.

그 문장이 절차보다 먼저 심장을 건드렸다.


선율: “괜찮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끊고, 물 한 모금 드시고…

가능하면 잠깐이라도 눈 감으세요.”

“그리고 내일부터는—혹시 통화가 필요하시거나,

불안이 다시 올라오시면”

“여기 윤서 씨 통해서 ‘연락 가능하신

시간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 단계에서

바로 정식 절차로 들어가려면,”

“자료 확보부터 해서 여러 단계가 있고,”

“한국 쪽이랑도 정식 절차를 거쳐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오늘은 정말…

편안하게 쉬는 게 우선입니다.”


다인(윤서): “…네. 감사합니다.”


선율: “네. 푹 쉬세요.”


통화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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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의 집

정적이 먼저 왔다.

전화가 끝나면 원래 소리가 돌아와야 하는데,

거실은 더 조용해졌다.

동현은 타이머를 끄지 못한 채 화면만 바라봤다.


04:30


윤서는 헤드셋을 천천히 벗었다.

급하게 벗지 않았다.

급하면 ‘성공’이 아닌 ‘불안’이 남는다.


동현: “… 누나. 방금… 들었어?”


윤서: “뭐.”


동현: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 말.”


윤서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

웃음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윤서: “들었지.”


동현: “아니… 그게 왜 그렇게—”


윤서는 동현이 말을 끊지 않았다.


동현: “오호…

스스로 결론을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은 자기가 떠올린 결론을 더 믿는다.”


동현: “…그 짭새-새끼…”

“본인이 먼저 나서잖아.”


“‘윤서를 통해서 연락해도 된다’는 말까지…

와우! 동현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윤서는 감정 하나 안 실린 낮은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윤서: “응.”

그리고는 상대의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윤서: “내가 끌어낸 게 아니야.”

“본인이 스스로 걸어 들어온 거지.”


동현이 침을 삼켰다.

동현: “근데 누나, 원래는 절차니 뭐니 하면서…

거리 두는 거 아니야?”


윤서가 폰을 들었다. 화면을 꺼두지 않은 채로.

꺼버리면 정적이 온다.

정적이 오면,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것 같았다.

빛이 꺼지는 순간, 애써 눌러두고 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되살아날 것 같았다.

지금 윤서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숨을 잠시 고른 뒤 윤서는 동현이의 질문에 답하였다.

윤서: “원래는 그래.”

“근데 지금은… 그 사람이 집에 혼자야.”


동현: “…”


윤서: “혼자 있는 사람은,”

“‘연락해도 된다’는 허락 하나에 붙어.”


동현: “그럼 이제 뭐 해?”


윤서가 숨을 짧게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다인’이었던 사람이,

다시 ‘윤서’로 돌아오는 숨이었다.


윤서: “내일은 본격적으로 ‘화상’으로 가는 게 좋겠어.”

“조금만 더 보여주고, 더는 못 보게 만들어.”


동현: “…그럼 궁금해서 더 미치겠지.”


윤서: “응.”


“그게 목적이니까.”


동현이 아주 작게 말했다.


동현: “… 걸려들었네.”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 “걸려든 게 아니라—”

“스스로 들어온 거야.”


[PART 2/3] 너를 품에 안으면 [25장-2부] — 허락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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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선율이 집.

윤서의 계획대로
선율을 끌어들이는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어제 윤서가 다인이로 연출한 통화가 끝난 뒤,

선율의 집은 오히려 더 시끄러워졌다.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도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제 짧게 보고 들은 다인이 목소리가
통화가 끝난 뒤에도
방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보다 먼저 흔들리던 숨.
“그래서… 기다리고…”에서 끊기던 말.


원래 선율이라면, 여기서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
본인 확인, 절차, 기록.
‘정식으로’라는 단어를 먼저 꺼냈어야 했다.

근데 오늘은—그게 늦었다.

선율은 손바닥을 문질렀다.
손이 차가웠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스피커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다음이었다.

선율은 노트 앱을 열었다.

“수사 메모”라고 마음속에서 명확히 이름을 붙이면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커서가 깜빡였다.


선율은 천천히 타이핑했다.

[고다인 — 금일 통화 요약(안정 확인)]

통화 성격: 정식 조사 아님 / 위로 및 안정 목적

상태: 불안, 호흡 흔들림, 자책

표현: “혼자 같아요”, “무서웠거든요”

연결: 엄마 친구 최윤서 통해 연락,

한국계 경찰 통화 예정이라고 전달받았다고 함


노트앱에 입력하고 나니, 머릿속이 정리된 것 같았다.

정리됐다는 착각.

그게 제일 위험했다.

커서가 한 번 더 깜빡였다.

다음에 묻는 문장이 떠올랐다.


“다음 통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선율은 손가락을 멈췄다.

정답은 뻔했다.

본인 확인.
신원 확인.
동의.
기록.


그런데 선율의 뇌는 그 정답보다 먼저,

다른 문장을 꺼냈다.

다인이 오늘 밤은 좀 덜 무서웠으면.

그 문장이 스스로의 규칙을 한 칸 밀어냈다.

선율은 자신도 모르게—짧게 한 줄을 더 쳤다.


다음 통화는 좀 더 자연스럽게.
절대 부담을 주지 말 것.
안정이 우선.

그리고 그 순간에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기가 더 이상 “경찰”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기대어도 된다고 믿게 만드는

사람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같은 날 윤서의 집.

같은 시간, 윤사의 방에는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윤서는 거실 조명을 끝까지 켜지 않았다.

간접등만, 낮게.

밝으면 디테일이 살아나고, 디테일은 질문을 부른다.


동현은 노트북 앞에 앉은 채 손을 계속 씻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을 깨끗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아직도 손끝에 밴 떨림을 어떻게든 죽이려는 쪽에 가까웠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 돌아와 화면을 확인했다.
꺼져 있는 타이머를 숨을 죽인 채 멈춰 있는 초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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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는 조명이 닿는 자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여전히 얼굴이 자연스레 잡히는 각도였다.
그 정도가 오히려 더 진짜 같았다.

동현이 화면을 보며 낮게 말했다.

동현: “누나, 어제 화상통화할 때 얼굴이 조금 빨랐어.

그렇게 가면 화면이 순간적으로 어색해 보일 수 있어.

내일은 몸을 움직이는 건 자연스럽게 가도,

얼굴이랑 표정은 조금만 더 천천히 가져가.

아직까지는 조금만 어긋나도 바로 티가 날 수 있어.”

여전히 빠른 움직임, 큰 자세 변화로

프레임 간 시간 일관성에서 문제가 생기기 쉬워서 질 수 있어.”


“그러니까 누나, 내일은 고개를 갑자기 돌리지만 마.

측면으로 확 꺾이거나 표정이 한 번에 바뀌면 경계선부터 뜰 수 있어.

몸은 자연스럽게 써도 돼. 대신 얼굴은 천천히,

시선도 급하게 흔들지 말고,

웃어도 입꼬리부터 조금씩 올려.

그래야 화면이 끝까지 버텨.”


동현이의 말을 들은 윤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윤서: “그 정도는 맞출 수 있어.”

동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모니터 속 윤서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현: “많이 보여줄 필요는 없어. 잠깐 잡혀도 자연스러우면 돼.

어설프게 오래 끌면 오히려 위험해지니까 그 점 명심해.”


윤서는 거울을 보듯 검은 화면 속 자기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낮고 이상할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 “지금부터는 끝까지 가야지.”

동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현: “내일은 진짜 화상통화까지 가려고?”

윤서는 시선을 화면에서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윤서: “가야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윤서로 서 있지 않았다.

눈빛도, 표정도, 말이 나오기 직전의 짧은 호흡까지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있었다.

동현은 모니터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이미 촬영은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동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야지.”
그 짧은 한마디가 오히려 더 잔인하게 들렸다.

윤서는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기보다,

이미 자기 차례를 알고 있는 배우에 가까웠다.

얼굴엔 힘을 뺐고, 눈빛만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동현: “그래도 혹시라도 티 나면 어떡해?”


윤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윤서: “티 안 나게 하려고 연습하고 있잖아.”


윤서는 화면보다 먼저 자기 호흡부터 점검했다.
말보다 중요한 건 숨이었다.
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었지만,

호흡은 오래 몸에 밴 습관까지는 쉽게 속이지 못했다.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감추기 위해 익혀 온 호흡 조절은,

시간이 지나도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윤서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침착했다.


동현이 노트북 화면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동현: “누나… 어제 통화 중 그 경찰이 ‘언제든 괜찮습니다’ 이랬지?”


윤서의 눈빛이 아주 짧게 번쩍였다.
흥분이 아니라,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윤서: “응.”


동현: “그럼… 진짜 걸려든 거네.”


윤서는 고개를 젖히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윤서: “걸린 게 아니라…

신선율은 본인이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거라니까.”


그 말을 들은 동현의 목이 잠깐 막혔다.

윤서는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보내는 문장을 짧게 다듬었다.
정중해야 하고, 가벼워야 하고,

‘도와주는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

그리고—한 줄을 보냈다.


윤서: “신 경사님,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인이가 오늘은 조금 나아졌대요.
혹시 가능하시면 내일은 ‘짧게 화상으로’

인사만 드릴 수 있을지 제가 조율해 볼게요.

부담은 절대 안 드릴게요.”


윤서는 선율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동현이가 물었다.

동현: “누나…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돼?”


윤서는 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목소리를 아주 낮게 꺼냈다.

다인의 톤으로, 다인의 숨소리로

동현이에게 연습하듯 말하였다.


윤서: “…아, 네에.”


동현은 그 한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은 연습인데도,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윤서는 다시 ‘윤서’로 돌아왔다.

윤서: “내일은 또 ‘인사’만 짧게 하는 것으로 해.

그리고 끝내고 자연스럽게

짧게 끝나야… 다음이 생겨.”


동현이 타이머 앱을 켰다.
손끝이 또 떨렸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윤서: “동현아, 넌 다시 프로그램 체크하고 준비해 둬.

내일은 더 쉽게 들어올 거야.”


동현: “왜?”


윤서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계산이 끝났을 때 나오는 표정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니까 선율이는 지금 불러내야겠어.”

윤서는 시선을 내리지도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윤서: “어제 그 사람이 그랬잖아.”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허락이었다.

그리고 허락은,

한 번 나가면—회수가 안 된다.

윤서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이번엔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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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 “누나, 지금 또 만나려고?”


윤서: “응. 이런 건 내일로 미루는 순간 변수가 생겨.

사람 마음은 생각보다 금방 달라지거든.”


동현: “뭐라고 할 건데…?”


윤서: “부담 주지 말고 정중하게 접근하는 쪽으로 확인할 게 있어서

잠깐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하면 충분해.

다인이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 많은 곳이나 공개된 자리보다는

조용한 공간을 더 편하게 느낄 테니까,

둘만 연결될 수 있는 비공개 방으로 유도하는 게 좋겠어.

괜히 다른 사람이 끼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해 둔 방이 있으면 그 링크만 자연스럽게 넘겨.

중요한 건 그게 네가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다인이를 배려한 선택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동현아, 네가 전에 만들어 둔 방 있잖아.

그 링크만 나한테 문자로 보내줘.

나도 그걸 그냥 바로 보내는 게 아니라,

신 경사한테 다인이가 원해서 준비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길 거야.”


윤서는 바로 선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한 번 울렸다.


선율(전화): “네. 신 선율입니다.”


윤서: “신 경사님, 윤서입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


선율(전화): “…네. 괜찮습니다.”


윤서: “내일 다인이와 화상통화 전에요.

제가… 드릴 게 좀 있어서요.”


선율(전화): “아… 네, 뭔가 나왔나요?”


윤서: “전화로 설명하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요.
자료를… 제가 직접 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잠깐의 정적.
선율의 머릿속에서 ‘원래라면’이 한 번 스쳤다.

원래라면—이런 건 접수, 기록, 공식 절차.

근데 오늘은 그 단어들이 유난히 멀었다.


선율(전화): “… 어디서 뵐까요?”


윤서: “사람 많은 곳이면 좋겠습니다.

잠깐 뵙고 싶어요. 신 경사님 얼굴도 보고요.

시간 오래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선율(전화): “알겠습니다.”


윤서: “감사합니다.
신 경사님… 어제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선율(전화): “… 별말씀을요.”


통화가 끊겼다.

동현이 숨을 삼켰다.


동현: “누나… 지금 그 사람, 나오게 하려는 거야?”

윤서: “이제는 나오게 할 수 있어.”

동현: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윤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현을 봤다.
눈빛에는 이미 망설임 같은 건 정리된 뒤였다.


윤서: “화상은 결국 화면이야.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고,

표정 하나 감추는 것도 어렵지 않아. 그런데 현실은 달라.

한 번 현실에서 마주하게 만들면, 그다음부터는 사람이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동현: “… 흔들린다고?”

윤서: “응. 한 번 받아들이게 만들면, 그다음부터는

두 번째도 쉬워지고 세 번째는 더 쉬워져.

사람은 자기가 이미 열어준 문 앞에서는 생각보다 경계를 빨리 늦추거든.”


동현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동현: “…그래서 누나는 지금 그 문을 열게 하려는 거야?”

윤서는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걸었다.

윤서: “아니. 이미 열렸어. 선율이는 이제

자기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들어오게 될 거야.”


[PART 3/3] 너를 품에 안으면 [25장-3부] — 잃어버린 감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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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만났다.

환한 시간대였지만 윤서는 일부러 안쪽 자리,

창가에서 조금 비켜난 그늘진 쪽을 골랐다.

밝은 곳은 표정을 너무 많이 드러낼 수 있고,

표정이 많이 드러나면 상대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붙잡고 질문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윤서는 질문이 많아지는 상황을 싫어했다.

자기가 원하는 건 설명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이었고,

가능하면 그 반응도 짧고 단순한 대답이어야 했다.


선율은 약속 시간에 맞춰 정확히 들어왔다.

윤서는 그런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을 지키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 기준과 절차를 믿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한 번 스스로 납득한 방향으로는 의외로 곧게 들어간다.

처음 경계만 넘기면, 오히려 그다음은 다루기 쉬웠다.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율을 맞았다.

윤서: “신 경사님.”

선율: “윤서 씨.”


가벼운 인사가 오간 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윤서는 앉자마자 작은 파일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출력물 몇 장과 캡처 화면,

그리고 링크 주소를 적어 놓은 메모까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그냥 불안해서 들고 나온 자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이 만남의 목적은 설명이 아니라 유도였다.

윤서는 선율을 직접 불러내서 경계심을 낮추고,

자신과 동현이가 미리 준비해 둔 링크로 선율을 연결시킬 생각이었다.


대면으로 신뢰를 먼저 확보해 두면,

나중에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켰을 때 선율은 훨씬 쉽게

그 링크를 누르게 된다. 윤서에게 필요한 건 선율이 의심 없이

자기들이 만든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윤서: “이게 요즘 돌아다니는 것들이에요.”


선율이 파일을 받아들였다.

그는 원래 문서를 빨리 읽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종이를 훑는 속도에 비해 초점이 한 박자씩 늦었다.

몇 줄 지나지 않아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글자가 또렷하게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문장과 문장 사이가 미세하게 밀리는 느낌이 스쳤다.


그는 곧바로 손으로 이마를 한 번 문질렀다.

피로 때문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윤서는 그 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봤다.


윤서: “이런 걸 직접 들고 와서 말씀드리는 게

부담스러우실 수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선율: “괜찮습니다. 먼저 보겠습니다.”

윤서: “다인이는 지금 ‘공식’이라는 말만 들어도 많이 힘들어해요.

조사나 진술, 기록 같은 단어를 들으면 바로 몸이 굳어버리거든요.”


선율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한 번 멈췄다.

오늘따라 ‘공식’이라는 단어는 이상할 만큼 무겁게 들렸다.

윤서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바로 어제 통화 이야기로 넘어갔다.

윤서: “그래서 어제 그 통화도 다인이한테는 그냥 연락이 아니었어요.

조사받는 시간이 아니라, 겨우 버티는 사람이 사람 목소리

하나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선율의 목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선율: “지금도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까?”

윤서: “네. 많이 안 좋아요. 그런데 경사님이

어제 그렇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언제든 연락해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윤서는 그 문장을 정확히, 조금도 흐리지 않고 꺼냈다.

“‘언제든 괜찮습니다.’’ 다인이는 그 말을 계속 붙잡고 있었어요.”


선율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원래는 위로로 건넨 말이었는데,

윤서가 그대로 되짚어 말하자 그 문장이 마치 약속처럼 들렸다.

윤서: “다인이는 그 말 때문에 오늘도 겨우 마음을 냈어요.

얼굴을 보는 건 아직 부담스러워해도,

경사님이랑 잠깐이라도 연결은 해 보겠다고 했어요.”


선율: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무리시키지는 않겠습니다.”

윤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윤서: “그래서 제가 오늘 뵙자고 한 거예요.”

선율이 시선을 들었다.

윤서: “다인이는 지금 아무 링크나 못 받아요.

모르는 번호나 낯선 계정,

공식적인 접속 방식 같은 것만 봐도 겁을 먹어요.

제가 옆에서 설명을 해 주고,

경사님이 어떤 분인지 직접 확인한 뒤에야 겨우 시도를 해 보겠다고 했어요.”


이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인으로 보이게 만든 화면은 윤서와 동현이가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그 연결은 선율이 혼자 있는 공간,

그것도 휴대폰보다 화면이 큰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가장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집이라는 공간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고,

혼자 있는 시간은 판단을 단순하게 만든다.

윤서는 그 조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선율을 직접 만나 신뢰를 심어 놓고,

이후에는 자기들이 만든 링크 하나로 선율을 자기들의 통제 안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윤서: “지금 여기서 바로 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인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연결되는 걸 더 불안해해요.

경사님도 집에 들어가셔서 혼자 편안한 상태에서 컴퓨터로 접속해 주시는 게 좋아요.

그래야 다인이도 덜 긴장하고,

저도 옆에서 안정시킬 수 있어요.”


이제야 선율 쪽에서도 흐름이 맞아 들어갔다.

오늘 가능하다는 말과 집에 가서 하자는 말이 하나로 연결됐다.

지금 당장 대면이 필요한 이유는 링크를 건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링크를 의심 없이 받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윤서는 한 박자 쉬었다가, 가장 중요한 요청을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윤서: “대신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다인이는 화면 캡처나 녹화에 아주 예민해요.

누가 자기를 남긴다고 느끼는 순간 바로 입을 닫아버려요.

오늘 연결이 되더라도, 우선은 편하게 이야기만 들어주셨으면 해요.”


선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기록과 증거, 절차 같은 익숙한 기준이 머릿속에서 한 번 올라왔다.

그러나 그 기준은 오늘따라 선명하게 힘을 쓰지 못했다.

피로 때문인지, 방금 전부터 자꾸만 늦게 도착하는 판단 때문인지,

아니면 윤서가 의도적으로 깔아 놓은 분위기 때문인지 그는 즉시 반박하지 못했다.


윤서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조급하게 밀면 사람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대신 선율이 스스로 ‘이건 배려다’라고 생각할 시간을 줬다.

결국 선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율: “알겠습니다. 상태가 그렇다면 우선은 그 기준에 맞추겠습니다.

다만 연결이 되면 상황은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윤서: “그렇게만 해 주셔도 충분해요.”


윤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이미 원하는 자리로 앉혀 놓은 사람의 확신이 묻어 있었다.

그는 다시 종이를 한 장 밀어주었다.

거기에는 접속 시간과 간단한 안내,

그리고 나중에 보낼 링크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윤서: “내일로 미루는 것보다 오늘이 나아요.

다인이가 마음을 먹었을 때 바로 연결하는 게 낫거든요.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다시 무서워해서 못 들어와요.”

선율: “오늘이면 몇 시쯤 가능합니까?”


윤서: “경사님 집에 들어가신 뒤면 돼요.

그때 제가 링크를 보내 드릴게요.

휴대폰보다는 컴퓨터가 나아요.

화면이 크고 안정적이면 다인이도 덜 불안해할 거예요.”


그 설명 역시 선율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다듬어진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윤서가 원하는 것도 정확히 그거였다.

큰 화면, 조용한 공간, 혼자 있는 상태.

그 안에서 선율은 더 쉽게 집중하고,

더 쉽게 몰입하고, 더 늦게 의심하게 된다.


선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율: “알겠습니다. 들어가면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연결이 되면 길게 묻지 않고 먼저 상태부터 보겠습니다.”

윤서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왔고, 필요한 약속도 받아냈다.

이제 남은 건 링크 하나를 보내는 일이었다.


윤서: “정말 감사합니다, 신 경사님.

다인이도 그 말을 들으면 안심할 거예요.”

선율: “별말씀을요.”


윤서는 그 말을 더 붙잡지 않았다.

여기서 감사를 길게 이어가면 장면이 닫혀 버린다.

윤서가 원하는 건 끝맺음이 아니라 다음 단계였다.

오늘 만남은 설득의 자리였고,

진짜 시작은 선율이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선율의 집은 혼자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공간은,

링크 하나만으로도 공기를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은 윤서였다.

선율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윤서(전화): “신 경사님, 지금 괜찮으세요?

다인이가 오늘은 길게는 못 하고, 인사 정도만 해 보겠다고 해요.”

선율: “네. 가능합니다.”

윤서(전화): “정말 잠깐만 할게요. 부담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선율: “알겠습니다. 연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윤서(전화): “그럼 지금 링크 보내드릴게요.”


통화가 끊기고, 링크가 왔다.
선율은 클릭했다.

화상통화 앱이 열리고 화면이 켜졌다.

처음에는 초점이 덜 잡혀 있어서 사람 형체만 흐릿하게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화면이 더 가공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선율의 시선을 더 붙잡았다.

잠시 뒤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윤서는 어제와 다르게, 이번에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숨기지 않는 척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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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윤서): “안녕하세요.”

윤서의 눈빛은 딱 한 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불안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바로 그 점이 선율을 붙잡았다.

선율: “안녕하세요. 지금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다인(윤서):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요.”

“엄마 친구분이 신 경사님이 정말 괜찮은 분이라고 했어요.”

“꼭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라고 했고요.”


윤서는 화면 너머의 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골라 쓰고 있었다.

상대가 경계를 늦추고 자기 쪽으로 한 발 더 들어오게 만들려면

어떤 속도로 말을 꺼내야 하는지,

어느 순간에 불안을 비치고 어느 순간에

안심으로 바꿔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다정함이 연기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오래전 나만의 꿈이었을 때 단 한 사람,

스팅비에게만 열어두었던 감정의 결도 조금씩 섞여 있었다.

더 잔인한 건, 그녀가 지금 흔들고 있는 남자가 바로

그 스팅비라는 사실을 윤서만 아직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율: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편하게 말씀하시는 게 더 중요합니다.”

윤서(다인)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엄마 친구분이 신 경사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무섭게 몰아붙이는 분은 아니라고,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분이라고 하셨어요.”


선율은 대답하려다가 한 박자 늦었다.

원래라면 그런 말에는 선을 그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경계가 먼저 올라오지 않았다.

화면 속 다인의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조심스럽게 번지는 미소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선율: “그건 과한 말씀입니다.

저는 그냥 필요한 걸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윤서(다인)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아직은 조심스러웠지만, 말끝에는 이미 반 박자 늦어진 경계와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윤서(다인): “그래도 저는 생각보다 신경사님 같은 그런 사람의 느낌이 좋았어요.

처음부터 무서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그게 생각보다 많이 다행이었어요.”


선율은 그 말을 듣고도 곧장 답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거기서 한 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상대가 안도와 의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관계가 섞일 여지를 만들지 않도록

더 분명하게 선을 그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단순한 판단이

평소처럼 곧게 올라오지 않았다.

귀 안쪽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아주 멀리서부터

얇게 울려오기 시작했고, 화면 속 얼굴은 한 번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지면서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시야를 붙잡았다.


선율: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하게 말씀하시다가 힘드시면 바로 끊으셔도 됩니다.”

윤서(다인)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과하게 밝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계산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안도하는 사람의 표정을 닮아 있었고,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윤서(다인): “제가 원래 이런 걸 잘 못해요.

누구를 믿고 말을 시작하는 것도 어렵고,

연결해 놓고도 괜히 후회할 것 같아서 계속 겁이 났어요.

그런데 신 경사님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덜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처음인데도 처음 같지가 않아요.”


그 말은 선율의 안쪽을 건드렸다.

처음인데도 처음 같지 않다는 표현은 듣는 순간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선율 역시 같은 종류의 낯섦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목소리도 분명 처음인데,

화면 너머의 사람은 자꾸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익숙함은 논리보다 먼저 몸을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선율: “그건 아마 지금 많이 불안하셔서

더 그렇게 느끼시는 걸 수도 있습니다.

편하게 느끼셨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윤서(다인)는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불안해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신 경사님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긴장이 조금 풀려요.

그래서 아까부터 괜히 더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말 뒤로도 몇 마디가 더 오갔다.

다인이 조심스럽게 묻고, 선율이 대답했고,

다시 다인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윤서는 선율의 반응을 하나씩 받아먹듯 확인하고 있었다.

어떤 말에 그의 호흡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지는지,

어떤 표현에 눈빛이 경계보다 안도 쪽으로 기우는지,

다인의 이름으로 불렸을 때

어느 정도까지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지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가 스스로 편안해졌다고

믿게 만드는 방식으로 조금씩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오래전

나만의 꿈으로 채팅창 너머의 스팅비를 붙잡아 두고 싶을 때

쓰던 부드러운 말의 결까지 다시 꺼내 쓰고 있었다.


선율은 분명 대답을 했고, 화면 속 다인은

중간중간 조심스럽게 웃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귀 안쪽의 얇은 울림이 길게 남기 시작했고,

화면 속 얼굴은 멀어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이상할 만큼 가까워졌다.

어떤 말은 분명히 들었는데도 금방 손에서 빠져나가듯 흐려졌고,

어떤 표정은 잠깐 스친 것치고는 오래 남았다.

통화는 생각보다 짧지 않았는데,

끝나고 나자 선율은 중간부터

무엇을 어떻게 주고받았는지 또렷하게 붙잡지 못했다.


희미하게 남은 감각은 몇 가지뿐이었다.

다인이가 한 번 더 웃었다는 것,

자기 이름을 조금 더 부드럽게 불러줬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분명 더 많은 말이 오갔는데도 그 말들의 모양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다인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그래도 연결해서 다행이었어요.

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심됐어요.”

선율: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음에 다시 연결하게 되더라도 부담은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서(다인)는 화면을 향해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 미소는 환하게 번지는 종류가 아니라,

불안을 간신히 눌러 놓은 사람에게서 겨우 허락된 안도처럼 보였다.

윤서(다인): “그 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화면이 꺼졌다.

선율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분명 몇 마디 이상 더 대화가 이어졌고,

자기도 그에 답했다는 감각이 남아 있었는데,

정작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은 건 앞의 인사와 마지막 몇 문장,

그리고 화면 속에서 조심스럽게 번지던 미소뿐이었다.

중간은 분명히 있었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대화의 한복판만 조용히 걷어낸 것처럼 그 부분만 비어 있었다.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런데도 귀 안쪽의 가느다란 울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편안했고, 그래서 더 이상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마음이 먼저 반응했고,

그 반응을 지금의 자신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선율을 더 조용히 흔들었다.

단순한 호감이라고 넘기기에는 너무 빠르고,

단순한 동정이라고 정리하기에는 너무 깊게 몸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휴대폰 화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통화 시간은 자신이 체감한 것보다 길게 찍혀 있었다.

분명 인사만 하고 끝내려 했고, 길게 끌지 않겠다고

스스로도 생각했는데 기록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화면 앞에 머물렀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말했는지는

중간부터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다인이가 자기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던 것 같고,

그때 자신이 평소보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는 감각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노트 앱을 열었다.

원래라면 가장 먼저 적었어야 할 말이 있었다.

본인 확인, 상태 불안정, 기록 보류, 다음 통화 시 주의사항.

평소의 선율이라면 그런 순서로 정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손끝은 잠시 멈췄고, 머릿속에는 다른 문장이 먼저 떠올랐다.

다인이는 오늘 웃었다.

그는 그 문장을 지우지 못한 채 한동안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봤다.


귀 안쪽에서는 여전히 가느다란 울림이 남아 있었고,

혀끝은 묘하게 말라 있었다.

몸은 분명 이 장면을 경계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마음은 그 반대 방향으로 한 발 늦게 끌려가는 것 같았다.

선율은 그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싫다고 잘라내기에는,

방금 화면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윤서는 자기가 원하는 반응을

정확히 받아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선율의 경계가 어디에서 늦어졌는지,

어떤 말에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는지,

다음에는 어디까지 더 깊이 끌고 갈 수 있는지를

차분히 정리하고 있었다.

윤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공들여 흔들고 있는 남자가,

오래전 나만의 꿈이던 시절부터 마음에 남아 있던

바로 그 스팅비라는 사실을.

그녀는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을 끝내 알아보지 못한 채,

복수라는 이름으로 누구보다 익숙한 방식으로 그를 흔들고 있었다.


윤서의 집 —

통화가 끝나자 동현이 숨을 크게 쉬었다.

동현: “누나, 방금 너무 많이 노출됐어.

얼굴이 저 정도로 잡히면 다음에는 바로 기억할 거야.”

윤서: “그래야 선율이 가 다음에도 그 얼굴을 바로 떠올리게 되지.”

동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저 사람 경찰이야.

한 번 이상하다고 느끼면 뒤로 바로 확인에 들어갈 수도 있어.”

윤서: “지금 중요한 건 뒤를 걱정하는 게 아니야.

먼저 마음이 붙게 만드는 게 중요해.”

동현: “그래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쓰면 흔적이 남잖아.

나중에 정리해야 할 게 생기면 그건 더 복잡해져.”

윤서: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들어오게 만드는 게 먼저야.”

동현: “누나, 설마 이걸 매일 하려는 건 아니지?”

윤서: “매일 할 거야. 대신 길게 끌지는 않을 거고,

짧게 연결한 다음 바로 끊을 거야.”

동현: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한 번에 확실하게 밀어붙이면 안 돼?”


윤서가 동현을 똑바로 봤다.

윤서: “사람은 모자라게 끝난 쪽을 더 오래 붙잡아.

한 번에 다 주면 거기서 끝나지만,

아쉽게 끊어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다시 들어오려고 해.”


동현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윤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을 너무 잘 알아들어서 더 불편했다.


같은 시간 선율의 집은

통화가 끝났는데도 방은 더 조용해졌다.

그런데 조용한 만큼 머릿속은 더 시끄러웠다.

선율은 휴대폰을 내려놓고도 한동안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검은 화면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그는 노트 앱을 다시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원래라면 가장 먼저 적었어야 할 건 감상이 아니라 기록이었다.

실명 확인 필요.

그 문장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대신 먼저 떠오른 건 얼굴이었다.

다인이는 오늘 웃었다.

선율은 손바닥을 문질렀다. 손이 또 차가웠다.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머릿속을 정리해 보려고 했고,

이번만큼은 정말 그렇게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눈을 뜬 순간, 방의 공기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휴대폰 화면 위 시간이 달라져 있었다.

선율은 그 숫자를 한참 바라봤다.

“눈만 감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갔지?”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입안이 말라 있었다. 혀도 무겁게 느껴졌다.


선율은 소파 팔걸이를 잡았다.

손에 힘은 들어가는데 감각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그는 다시 노트 앱을 봤다.

커서가 깜빡였다.

그 깜빡임이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선율은 조용히 한 줄을 쳤다.

[참고] 다음 통화도 부담을 주지 말 것. 안정 우선.

그리고 그다음 줄을 치려는 순간, 손끝이 멈췄다.


머리가 툭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잠든 게 아니었다.

잠이라고 부르기에는 의식이 꺾이는 속도가 너무 갑작스럽고 이상했다.

방 안의 감각이 한 번에 꺼지듯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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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6장-1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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