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오랜 세월을 관통해 당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남긴다. 진정한 고전은 여러 번 읽으면, 읽을 때마다 다른 지점으로 마음에 닿는다. 내게 최고의 고전은 [데미안]이다. 6번 읽은 데미안은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읽고도 뭘 읽었는지 모르겠던 첫 번째, 그래서 데미안이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도 헷갈렸던 두 번째, 관계 안의 혼란과 침잠에 대한 생각을 줬던 세 번째,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옴에 대한 의미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 내 안의 카인을 찾았던 네 번째, 한 명의 부모를 벗어나 자기를 찾는 보편적 젊은이가 보였던 다섯 번째 그리고 결국 그게 내 이야기 같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데미안은 내게 또 다른 무언가를 주겠지... 그 책은 책장에 절대적 자리를 확보하고 가치를 발하고 있다.
두 번째 다시 보고 싶은 책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저자의 책이다. 데미안을 처음 읽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읽는 중의 모호함은 없었으나 읽고 나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큰 지혜 속에 들어가 있어 지혜의 겉모습을 보지 못하는 작은 내 존재가 느껴지는 책, 싯다르타였다. 책 제목과도 같은 불교 향내를 풍기는 소설이다. 언뜻 헤르만헤세가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도 생각이 크고 넓은 걸까? 글 쓰는 사람은 경험이 재산이라던데 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소한 경험과는 확실히 다를법한 그의 생각이 부럽기까지 했다.
부러워할 경험은 아니었다.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자살기도를 하기까지 한 평범하지 않은 고통과 고뇌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 정도 깊어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앞으로 내가 겪는 그 어떤 아픔도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이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아직도 몇 번을 더 읽어야 할지 모를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그래서 나는 아는 게 없다. 느낌만 있다. 아주 작은 알듯 말듯한 느낌은 세상 모든 것은 완전하다는 단일성이다. 돌 속에 생명이 있다. 어린아이 속에 죽음이 있고 노인 속에 영원이 있다. 죄는 자비를 품고 있고 모든 이에게 부처가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완전하고 선하며 고귀하다.
돌은 세월이 흘러 흙이 된다. 흙은 식물을 품는다. 식물에게 흙의 미네랄이 흡수되고 동물은 식물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돌은 생명이다. 돌고 도는 세상 이치가 인간의 윤회와도 닮아있다. 돌이 생명이듯 강은 산이다. 강에게서 배운 바수데바는 운명과 인연의 굴레로 싯다르타를 만나 그에게 강의 가르침을 주고 산으로 떠난다. 강에게서의 지혜는 고타마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 안에는 부처가 있다. 그 누구도 죄악만 가진 사람은 없다. 그 안의 부처를 존경해야 한다. 나마스테... 내 혼란을 나열해 봤다. 감동과 느낌은 있으나 깨달음이 있기에 나는 아직 얕다.
또 다른 인상 깊은 부분은 누군가의 교리, 가르침에 목메기보다 강물처럼 흐를 것, 스스로의 경험에서 지혜를 찾아가야 한다 부분이었다. 사람은 원래 어떤 글을 읽어도 자신에 빗대어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인생에 큰 가치가 자식이라 나는 역시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에 머무른다. 싯다르타는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가 갈구하는 배움을 향해 나아갔다. 세속의 어둠은 세속 안에 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향락의 덧없음도 말로, 글로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모두가 스승이었고 모두에게서 배웠다.
자식에게 자신의 지혜와 깨달음을 지식으로 전달하려 하면 욕심만 커질 뿐이다. 어차피 돌고 도는 윤회를 열반 근처에도 가볼 수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끊을 수는 없다. 느끼고 경험하는 만큼, 딱 그만큼만 나아갈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아비의 마음은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모두 주고 싶으나 윤회의 굴레 속에 인간으로 집착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이런 세속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불가능해 보인다.
살아보니 내 세상에 공부가 최고였다고 자식에게 하나의 사다리를 알려주곤 한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그게 최선의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말 안 듣는 자식은 빨리 강물 따라 흐르고 착하고 말 잘 듣는 자식은 한참 지난 후에 부모의 강요 속에 자기 아닌 자신을 만나 원망할지도 모른다. 더 깊은 부모 자식의 윤회의 굴레로 빠져든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전생에 빚을 진사람이 부모가 된다는... 다음생에 자식에게 전생의 빚을 갚으며 속죄한다는 일종의 윤회의 속설이다.
흘러가게 내버려 두자. 자식은 내가 아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수록 "절대 원리" 속에 착실하게 원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아이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 부모로 건재한 지금 아이가 내 곁에서 지지를 받으며 모든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식 사랑이다.
== 요약 ==
모든것은 선하고 완전하다. 단일성
지혜는 가르침으로 전할 수 없다. 경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