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녁 5시쯤 되면 딸이 내게 묻는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이제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루틴이다. 어플을 켜고 먹고 싶은 음식을 캡처해서 카톡으로 보내온다. 그럼 나는 남편의 퇴근시간을 고려해 어플을 켜고 배달을 시킨다. 우리 집 저녁은 배달음식이다. 저녁거리로 밥을 하지 않은지 2년쯤 되었다. 나는 나쁜 엄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거의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메인메뉴는 물론이고 주말마다 밑반찬을 몇 시간씩 했던 시절도 있었다. 아이의 이유식도 한 번도 내가 만들지 않은 음식을 줬던 적이 없다. 남편이 공보의 생활을 했던 3년의 시간은 사는 곳이 정착되지 않아 직업을 포함한 다른 활동이 불가능했고, 맞벌이를 하다가 외벌이가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쪼들렸다. 그때는 어쩔 수 없어서 모두 해 먹었다. 한 달에 한번 두 번의 외식도 비용을 고려해 저렴한 메뉴를 결정해야 했다. 갈비탕처럼 할 수 있는 음식은 직접해먹 었다. 할 수 없는 음식을 할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드는 게 그때 내게 가장 큰 과제였다.
음식 만들기가 재능이었다면 충분한 시간만큼의 수련이었다. 울릉도에서의 1년은 거의 극기훈련이었다. 남편이 점심까지 집에서 먹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되는 밥은 한 달에 외식 2끼였다. 지금은 좀 좋아졌으려나.. 재료를 구하는 것도 이곳 육지에서 처럼 당연하지 않았다. 태풍이 올 때는 배가 다니지 않아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슈퍼마켓에 식재료가 바닥났다. 바닥을 드러낸 냉장고에 덩그러니 하나 있는 만두를 사 오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냉장고가 텅텅 비도록 오래 배가 끊긴 적도 있었다. 겨울이 되면 큰 배가 다니지 않는다. 여름철 관광 성수기에 다니는 큰 배에 냉동고가 딸려 있었고, 비수기인 겨울에는 큰 배는 수리에 들어가 작은 배만 오갔다. 겨울 파도에 배도 뜸하고 냉동식품도 없는 그때를 버티게 했던 것은 백종원 레시피였다. 그때 가장 큰 과업이 밥이었으니 거의 종교라도 해도 될법하다. 스파게티 루(버터와 밀가루로 만드는 스파게티 소스의 베이스)를 만들어 먹었고, 한번 만들면 2끼는 해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금은 1년에 한두 번 싸는 김밥을 일주일에 한 번씩 쌌다. 다시 생각해도 엄청난 트레이닝이었다.
밥 하기가 너무 싫었다기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서부터 밥을 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생활을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가진 후에도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적, 외적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4~5시간씩 밥하고 집안일을 하는데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상황에 의해 원가족의 분위기에 의해 그때까지 나는 가정적인 아내, 집과 가족밖에 모르던 엄마였고 가족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혼자의 시간이 필요한 엄마, 배우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아내는 그들에게 불편했다. 또 그들의 불평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평화로운 가정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흉이 나였다. 나만 가만히 있으면, 이전처럼 행동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수차례 뒤집혔다 다시 돌아갔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가사분담 없는 가정은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때보다 더 큰 좌절감을 줬다. 뭔가 바꿔야만 했다. 처음으로 아침에 밥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침은 아메리칸스타일이다. 샐러드와 간단한 빵. 다음은 빨래를 개지 않겠다고 말했다. 특별히 빨래 개기인 이유는 나는 진짜 특별하게도 빨래 개는 일이 싫었다. 빨래는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분담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가사 도우미 비용, 각종 로봇 청소기와 가전제품 업그레이드로 자신의 가사분담을 대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저녁밥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맛있는 걸로 시켜주기로 했다. 이런 단계적 변화는 2년 동안 서서히 이루어졌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영양적으로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이후 더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집에 과일과 채소가 늘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두는 정도다. 큰 의미 없지만 배달도 가능하면 생식이 가능하거나 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한다. 배달음식이 몸에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우리 가정의 경우에 정신건강에는 좋았다. 아침이 간단해진 자리에 모닝루틴 아침공부가 들어왔다. 아침공부를 하면 나머지 시간을 놀더라도 성장하는 하루를 살고 있다는 안정된 마음이 내 불안을 잠재웠다. 오후 집안일을 줄이니 운동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에게 등 돌리고 집안일하던 엄마에서 함께 운동하고 같이 TV 보며 배달을 기다리는 엄마가 되었다.
뭐가 득이고 어디까지가 실인지 알 수는 없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다. 죄책감에 채워보는 채소와 과일로 영양가를 채울 수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도 나는 타인의 시간을 사기로 했다. 남이 준비해 준 고마운 식사 덕분에 적어도 집안일로 짜증 난 아내는 사라졌다. 공부하고 도전하고 성장하는 엄마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