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첫 명상은 25살 때 경험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째 편입학을 위한 수험생활 중이었다. 수험생활 첫해 10군데가 넘는 학교에 지원하고 모두 불합격했다. 이후 짐을 5번 다시 싸가며 겨우 얻어낸 1년의 시간. 이번에 떨어지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지만 확신은 없었다. 몇백 명이 몰리는 시험에서는 많아야 5명 정도를 뽑았다. 연초에 열정이 불안으로 바뀌면서 불안해서 공부 못하고, 공부 못해서 불안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찾게 된게 요가원이었다. 점심시간 직장인을 위해 열린 강좌였다.
이제 생각해 보면 내 첫 요가는 정말 특이했다. 진짜 너무 빡셌다. 한 동작을 군대에서 얼차려를 받는 것처럼 반복해서 요가 끝나고 나면 늘 다리가 후들거렸다. 유연성을 키우는 스트레칭에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빠지지 않고 일주일에 5번 요가원에 갔다. 혼자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말할 사람도 없고 마음둘 곳도, 갈 데도 없었다. 학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신체적 고통의 두려움인 동시에 위안이었다.
50분의 수업 중 45분을 땀이 뚝뚝 흐를 만큼 쉬지 않고 운동을 했고, 마지막 5분은 사바아사나, 송장자세로 누워있는 시간이 있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가끔 잠들어버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졸림속에 머리가 투명해지는 시간이다. 세상의 아무것도 단지 그때는 날 괴롭게 하지 못했다. 딱 그 5분은 생각이 머리에 들어올수 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지나고 떠오른 것이다. 내 마음은 고요 그 자체였다.
그 고요함이 날 살렸다. 시시각각 나보다 더 불안해하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나도 이 인생이 처음이라 불안한데, 부모님은 그들 인생에 첫 번째 낳은 아이가 자리잡지 못한 게 처음이라 자기 일보다 더 큰일처럼 불안을 느끼셨다. 요가를 다녀오지 않으면 책상에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에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요가를 다녀오지 않으면 나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 같았다. 고작 25살 나이에...
그때 경험한 고요가 명상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건 매일 그 시간의 누적이 늘 목구멍에 걸려 안절부절못하며 펄떡거리는 마음을 아랫배까지 끌어내렸다.
명상 덕분인지, 노력 덕분인지, 엄마의 기도 덕분인지 합격했다. 이후 생활은 절실하지 않았다. 힘들긴 했지만 마음의 고요가 절실하지 않아지자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편입의 추억으로 포장되어 기억에 묻혔다. 그러다 다시 삶의 바닥을 만났다.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생각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억울했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매일 떠올랐다. 끔찍한 상실을 매일같이 다시 겪었다. 남들에겐 과거가 되었지만 그 기억이 내게는 현실의 날카로운 기억들로 여전히 고통받았다. 살고 싶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아이가 5살 우리는 울릉도에 살고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매일 관사 뒤에 있는 작은 산에 올랐다. 산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었고 작은 불당이 있었다. 종교도 없고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ㅇ낳았지만 올랐다. 매일 불당 앞 작은 벤치가 목적지였다.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랐다.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힘든 몸을 벤치에서 앉혔다. 매일 같은 길, 같은 시간, 같은 곳을 바라봤다. 역시 힘듦은 생각을 비웠다. 체력은 덤이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다. 내 계획과는 상관없는 일이 수시로 쏟아진다. 다수의 사소한 걱정과 가끔 큰 고민에 삶의 폭풍우를 맨몸으로 맞는 것 같은 시간을 만난다. 많은 힘듦은 하루 만에 해결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견디고 버티다 보면 인지하지 못하던 사이 벗어나 있는 게 삶이 굴곡이다. 피해 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단지 잠시 머리를 비우면서 마음에 들어찬 내가 버린 적 없는 쓰레기를 비우다 보면 그 삶도 적당히 살만해진다.
내가 했던 게 명상인지 아닌지 잘은 모른다. 대단한 깨달음이나 기적적인 변화는 없다. 힘듦을 버틸만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시도 생각이 떠나지 않는 날이 다시 찾아오면, 다른 일을 방해할 만큼의 고민이 생기면 나는 또다시 몸을 움직여 머리를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