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배는 불렀다. 만삭에 낳은 아이가 엄마품 대신 하늘나라로 간지 일주일이 다 되어갔다. 아무도 첫째 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이유와 왜 다들 만나기만 하면 눈물을 훔치는지를...
4살 어린 딸에게도, 30대 부모인 우리에게도, 50대 조부모인 어른들에게조차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포동이는 38주 만삭에 갑자기 심장을 멈췄다. 의사는 무책임한 말투로 말했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것처럼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누군가를 원망해야 했다. 이틀 전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받았다. 그때 낳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의사를 원망해야 할지, 말도 안 되는 시집살이를 시킨 시부모를 원망해야 할지, 뱃속의 아이가 또 딸이라고 서운해하던 친정부모를 원망해야 할지, 인생의 과업 때문에 가족을 신경 쓰지 못한 배우자를 원망해야 할지... 모두 다 원망스러웠고 그렇다고 모두 당신 때문이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책임한 나를 원망하기로 했다. 첫째 때 한 번도 마시지 않던 커피를 가끔 마셨었다. 맥주를 마시고 싶어 무알콜에 알코올이 미량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정기 검진 때 의사가 일을 그만두고 집에 좀 누워있어야 된다는 권고를 삶이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는 말로 무시했다. 아이를 그냥 보낼 수 없어 화장을 해줬다. 아이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포동이를 위하는 척 나를 위해 샀던 모든 물건을 기부하고 난 후 즐거움, 기쁨, 행복, 안도, 위안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일도 그만뒀다. 임신 중 일하는 내내 둘째 "때문에" 출산 후 일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는데, 일을 못하는 이유는 둘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따라 울릉도에 갔다. 그곳에 가면 자연이 자연스레 마음을 치유해 줄 것만 같았다. 이미 심해진 우울증은 울릉도라는 진료받을 곳조차 없는 곳에서 깊어져갔다. 그 1년을 남들은 간혹 '울릉도 1년 살기'라며 부럽다는 표현을 한다. 그때 그곳 나와 딸에겐 지옥이었다. 생각해 보라. 직장 생활한다며 집안일에는 관심도 없다가 1년 동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삼시 세끼를 온전히 내 힘으로 차려야 했다. 정신도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 년 뒤 우리 세 가족은 육지로 다시 이사했다. 딸을 생각해 우울증 치료를 받아보자던 남편의 권유로 병원에 갔다. 망가졌다고 인식하지 못했던 가족관계가 내가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안정되어 갔다. 나는 비교적 정신과 질환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늘 보는 일이었고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업적 특성과 상관없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자신이 초기에 우울증임을 잘 인지할 수 없다. 1년 6개월간 약을 먹었다. 우울증 약은 막상 먹기 시작하니 일주일 만에 증상이 거의 사라졌다. 목구멍에 걸려있는 것 같던 불안이 골반까지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증상이 사라졌다고 바로 약을 끊을 수가 없다. 호르몬 변화로 생긴 우울증. 내 몸이 다시 호르몬 정상수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약을 먹어야 했다. 끊을 때는 그보다 더 오래 천천히 끊어야 했다.
건강검진 중 우울증이 의심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과거보다 의식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병원에 가기를 꺼린다. 우울을 단순히 "기분"으로 단정 지어버린다. 우울증이 기분이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고 반드시 약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증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죽여가는 그때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시들어간다.
견뎌냈던 1년 울릉도 삶에서 딸이 참아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제 남은 유일한 자식이라는 생각 때문에 4살 아이에게 선생님, 학원 없는 울릉도에서 엄마가 선생님이 되어 영어와 수학을 들이댔었다. 그때 얼마나 싫었던지 딸은 5세부터 7세까지 알파벳만 봐도 진저리를 쳤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운동을 좋아한다고 해도 출근 전 2시간, 퇴근 후 2시간을 운동하러 갔다는 건 집에 있기가 힘들었다는 증거다. 불안과 우울이 만들어낸 관계의 질병이었다.
친정아버지께 우울증 약을 권한적이 있었다. 이유는 여러 개였지만 가장 큰 이유가 함께 사는 가족이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가 정신병자야?"라며 분노하셨다. 결국 치료를 시작하지 못했다. 우울증은 환자의 협조와 병식(병에 걸렸다는 인식)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정신과 질병은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와 함께 메이저과에 속한다. 죽고 사는 문제라는 말이다. 특히나 정신과 질환은 관계의 문제를 악화시키고 그로 인해 병을 더 깊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을 함께 병들게 한다. 식물 뿌리를 썩게 만드는 소금물처럼
기분은 안녕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