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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Aug 08. 2024

한배를 탄 운명

비장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구조를 할 때 쓸법한 튜브형 무동력 보트에 우리 가족 5명이 한 줄로 섰다. 다른 3명의 일행과 짝지어 양쪽으로 나눠 보트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인지, 물살에 타고 넘는 보트의 출렁임 때문인 가슴도 출렁거린다. 하나, 둘, 하나, 둘 가이드분의 구령에 맞춰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바위를 만나 부딪힐 때도 물살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 때도, 심지어 균형을 잃고 배가 뒤집혀도 전부 즐거움이고 재미였다. 평소에 못하던 가족과의 스킨십도 자연스럽다. 


20년쯤 전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놀러를 간 게 그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초등학교시절(당시 국민학교) 여름방학이면 휴가를 갔었다. 부모님은 강, 바다 할 것 없이 남들가는데는 보여주고 경험시켜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남동생이 태어났다. 막내가 태어나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에 갔다. 여동생도 이어 대학에 갔다. 지금보다 20~30년 젊은 아빠는 사회생활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남동생이 이제 10대가 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어느 여름 우리는 동강에 래프팅을 하러 갔다. 내 기억 속에서 우리 가족 5명이 모두 웃고 있었다. 모두 함께 여행가 행복했던 기억이라면 이때가 유일하다. 12살 어린 남동생은 내게 조카 같거나 까마득한 후배 같았다. 이때 남동생이 처음으로 형제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 내게 가족은 태어나 전부였다. 엄마, 아빠가 아니었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을 은혜를 입었다. 거기다 나는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될 운명이었다. 50%의 완치 확률, 높다면 높지만 딸의 장애를 두고 생각하기에 2년,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불안했을지 아이가 생기고 난 지금 생각하면 앗찔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유독 애착이 많던 아빠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초등학생시절 내 인생의 절정을? 달리던 그때 나는 아빠에게 사랑받는 딸이었고 아빠는 내 롤모델이었다. 딱 1등만 하던 초등학교 때까지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부모님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교를 가면서 딸로서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갔다. 거기에 비해 초등학교 교사에서 시작해 교육장까지 잘 나가던? 아버지는 딸로서, 학생으로서의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장학사, 교육장까지 사회적 역할을 잘해나가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자랑이어야 했고 우리도 아버지의 자랑이 되어야만 했다. 


기대는 나를 힘들게 했다. 어쩌면 그 기대로 우리 삼 남매는 남보기에 좋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덕분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는 분명 우리를 병들였다. 늘 '자식으로서' '남들 눈에'번듯하게 자라기 위해 강요되었다. 우리는 한배를 탄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남편과 충돌을 겪었다. 나와는 다른 가족관을 갖고 자란 사람이었다. 각자의 조각배를 타고 각자의 인생을 운전하는 그가 처음에는 이상해 보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내가 아는 가족은 우리 엄마, 아빠, 원가족뿐이었다. 시댁은 내가 알게 된 두 번째 가족, 그들의 다른 방식이 특이하고 친밀감이 떨어진다고까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의 인생배는 오직 홀로 자신의 키를 잡는다. 


운명공동체 한배를 탄 운명에 '나'는 없었다. 모두가 역할뿐이다. 딸이고, 누나이고, 엄마이며, 배우자로 역할을 잘 해내길 요구받는다. 퇴직을 하고 몰락 아닌 몰락하는 아버지를 위해 모두의 희생이 필요했다. 이 또한 역할에 집중된 가치때문에 생긴 문제다. 아버지는 돈을 벌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며 가치의 상실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덫에서 원가족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운명을 함께하는 배에서 내리겠다는 선언을 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나로서가 아니라 K장녀로 살아가는 인생이었다. 아직까지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을 살기 위한 가족 간의 거리는 아직도 인정받지 못한 채 혼자만의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생각을 강압적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다. 고쳐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날 버리고 살지는 않기로 했다. 


서운하면 서운한대로 남겨두고 원망하면 원망하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사는 길이 역할, 기대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길이다. 강하게 거부하는 부모님을 보며 포기하고 원래 살던 대로 사는 게 가장 무난하게 세월을 흘려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내가 홀로 서는 길이 함께 몰락할지도 모르는 운명공동체의 무거운 짐을 내 딸에게 대물림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동강에서 시원했던 마음과 행복했던 가족의 추억 속에 우리는 함께 무사히 일주를 마쳤다. 그리고 그 배에서 내려 각자의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운명공동체 한배에서 내려 각자의 인생을 서로 응원하고 기뻐해줄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고 싶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돌아갈 우리 삶은 결국 각자 자기 짐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 자기를 버리는 희생이 마땅한 관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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