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내가 정한다.
좋은 의미만 포함한 말은 아니다. 우선 이사를 많이 다닌다. 결혼 후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친정엄마는 성장에 따라 집을 바꿔 타는 우리 가족을 달팽이라 부른다. 직장이 있는 엄마로 이사 다니는 스트레스는 작다고 말할 수 없다. 연차를 내가며 전세를 보러 다니고, 살던 집을 약속 잡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등의 집과 관련된 처리해야 할 일이 전부가 아니다. 아이의 전학부터 아무리 학원을 다니지 않지만 운동이나 취미학원을 다시 알아봐야 하거나 하다못해 잔병이나 검진으로 다닐 소아과, 치과, 내과, 이비인후과... 모두 새로 알아봐야 한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데도 장점은 있다. 묵은 짐이 없다. 너무 버려서 탈이라면 모를까... 남편은 이제 뭐가 없으면 당연히 내가 처분했을 거라 생각한다. 소비도 덜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도 집에 안락의자를 하나 더 들이고 싶었는데 좁아지는 집과 다음 이사를 생각하면서 참았다. 적정소비와 쓰임을 다하는 삶을 이사를 다니면서 배웠다. 집을 내가 정하는 이유는 집, 가정과 관련된 99%의 일을 나 혼자 처리해야 할 입장 이어서다. 남편은 주말도 없이 일을 하고 10시가 되어야 들어온다. 가사분담 뭐, 이런 말을 꺼낼 처지가 못된다. 다행히 내 집은 아니지만 전세로 옮겨가며 살고 싶은 집에 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짐에 감사할 따름이다.
현재 3년이 넘게 살고 있는 이 집도 내가 선택했다. 대형쇼핑몰을 끼고 있어 아빠 없이도 이따금 외식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가 컸고 쇼핑몰 안에 있는 서점과 카페는 내게는 꼭 필요한 곳이었다. 또 집 주변에 대형병원을 끼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어릴 적부터 엄마를 많이 놀라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어지럼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양호실로 찾으러 가야 했다. 이비인후과 소아과 치과등 매달 가야 할 병원이 여러 개라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갈 수 있는 병원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남편의 출근시간과 내 출근시간의 중간지점이었다.
결혼생활 14년 동안 5번의 이사를 다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이제까지의 집 중에서는 가장 우리 가족에게 안성맞춤이다. 이 집에 와서 딸이 방독립을 했고 자리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이제야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딸도 자기 방을 이리저리 꾸미고 자기 공간 안에서 꿈을 키울 나이가 되었다. 남편에게는 거실을 양보했다. 거실에 운동기구며 게임, 1인용 안락의자를 들여주고 얼마 되지 않는 쉬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꾸며줬다. 물론 남편은 문이 닫히는 혼자만의 공간으로서의 방을 원하겠지만 뭐든 상황에서의 최선을 다하며 사는 거니까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안방을 제외하고 하나의 방은 공식적으로 서재다. 사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귀퉁이에 책상과 컴퓨터가 있다. 공식적 서재는 모두의 방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그곳은 내방이다. 하루에 매일 3시간 이상 그 책상에 앉아 일상을 그려나가고, 그곳에서 글도 쓰고, 책도쓰고, 강의도 만들고, 꿈도 키운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 나의 공간은 식탁이었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게 치워도 너무 쉽게 허물어져버리는 식탁. 공개된 장소에 있어서 수시로 집중을 깨야했던 공간이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침범당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3년 전에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오면서 계획적으로 서재를 노렸다. 오래된 삐걱거리는 의자를 버리고 쿠션이 좋은 의자로 교체하며 그곳은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오늘도 4시부터 일어나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고요한 시간 직장인도, 엄마도, 배우자도 아닌 내 또 하나의 삶이 그곳에서 이어진다.
내년 2월이 되면 지금의 보금자리에서 산지 만 4년이 된다. 아마 또 이사를 가야 하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또 한숨부터 나온다. 내 소유의 집을 갖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10년 안에 남편이 본인 소유의 집을 갖게 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으나 남편 소유의 집에 살게 될 가능성은 낮다.(투자목적으로 예상...) 앞으로 2~3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이삿짐을 싸고 풀어야 한다.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약간은 좋은 구석도 있다. 그로 인해 나는 보다 실험적인 일상을 공간까지 계획해서 실천하고 시행착오 해볼 수 있다. 더 나다운 일상과 가정생활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집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