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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Aug 29. 2024

똥손의 기적

나는 엄청난 똥손이다. 내게 온 생명은 다 죽어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때 학교 앞에서 팔던 100원짜리 병아리가 시작이었다. 그 작은 발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작은 노랑색 몸을 풍선처럼 짜가며 "삐약" 소리 내던 내 병아리. 생명에의 책임감 없던 무책임한 주인은 샛노랑 보물을 보물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언제 없어진 줄도 모르게 엄마로 하여금 처리? 되었다. 다음은 예쁜 하양보물이었다. 대학교 외롭게 자취하던 시절 아기토끼를 분양받았다. 토끼가 일반적으로 사람과 얼마나 교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 집 하양이는 달랐다. 내 발을 배게 삼아 기대고 누워 나랑 같이 텔레비전을 봤다. (기억의 왜곡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랬던 하양이는 내 무지로 죽었다. 너무 소중하고 예뻐서 그 아기토끼를 목욕시켰고 드라이기로 잘 말려줬고 다음날부터 설사를 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길렀다. 그동안 절대 아무것도 키우지 않았다. 그러다 유치원 실습으로 딸이 집에 들여온 '호야' 한줄기를 만나게 되었다. 별것 아닌 화분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게 온 생명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작지 않았다. 또 죽어나갈게 뻔했다. 나는 똥손이니까.. 


호야는 죽지 않았다. 지금은 13살인 딸이 6살 때 집에 들고 온 호야는 잘 자라 2번의 분갈이를 했고 2년 뒤부터 일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 손에 들어와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이었다. (딸 제외) 그린티(호야의 이름) 그렇게 우리 식구가 되었다. 그러다 4년 전 이사를 했다. 별생각 없이 하던 대로 이삿짐센터를 통해 이사가 끝났다. 직장에 다니며 짐을 다시 정리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이 한 달쯤 지나갔다. 어느 날 그린티를 자세히 봤다. 맨날 거실 탁자에 있었는데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느라 세심한 눈길 한번 주지 못했다. 그린티는 아파하고 있었다. 이삿짐센터에서 이사를 할 때 다른 짐에 눌려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사 후 금방은 비슷하더니 서서히 잎색도 연해지고 눌렸던 부분은 잎이 다 떨어지고 볼품없게 변해버렸다.


아주잠깐 죽어나가기 전에 버려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족이라고 말해놓고 치사하고 비열한 생각이었다. 불편함과 미안함을 느끼며 햇빛이 잘 드는 창가 가장 좋은 자리에 두고 함께 생활했다. 식물이지만 상처받은 가족을 보고 지내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사하고 4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다시 그린티가 꽃을 피웠다.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세상을 연결하고 그로 인해 성장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다. 이사로 인한 불편한 경험은 인간관계에서도 있었다. 결혼을 학생시절에 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정해진 게 없었다. 남편은 아이가 3살일 때 공보의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어디로 떨어질지 모를 순간이었다. 피부과라서 소록도까지는 생각해 봤었는데 울릉도로 가게 될지는 몰랐다. 막 적응이 되려던 바로 1년 뒤에 다시 이천이라는 그야말로 연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 장소로 이사했다. 


결혼 후 시작된 이사는 안 그래도 소심하고 좁은 인간관계를 더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1~2년 후면 헤어질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새로운 만남에 마음을 열기도 힘들었고, 그랬다가 헤어지고 상처받기 싫은 마음 때문에 사귀지 않았다고 해야 더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던 중에도 가깝게 지냈던, 나는 친구라고 믿은 이웃사촌이 있었다. 소탈하고 적극적이고 유머감각 있는 그녀를 나는 좋아했고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생전처음 남편과 아이를 집에 두고 아파트 상가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현재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지금 직장을 다니지만 회식도 참여하지 않으니, 전업주부로 생활하던 그 시절의 나로서는 파격적인 일탈이었다. 


우리의 추억은 전국구로 쌓였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켜 놓고 이천에서 서울까지 나들이를 나오기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마음 가는 어느 곳이든 함께 놀러 다녔다. 그녀 덕분에 골프에 입문해 보기도 하고 이천 유지 사모님들의 모임에 따라간 적도 있었다. 무겁고 심각한 나와 다른 유쾌하고 명랑한 그녀와 함께한 생활이 행복했다. 


시간은 흘러 남편의 공보의가 끝나갔다. 그녀는 우리가 이천에 남길 바랬다. 그녀의 바람이라서가 아니라 미래가 걸린 일이라 이천이나 용인에 남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고, 결국 우리는 서울로 왔다. 우리의 결정이 있은 후 그녀는 근처 신축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집들이가 있었다. 함께 어울리던 모두가 5만 원씩 모아서 선물을 샀다. 그리고 집들이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는 내게 5만 원짜리 상품권을 내밀었다. 명목은 이후 서울로 이사할 내 집의 집들이 선물을 미리 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와의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5개월을 더 근처에서 살았지만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내 쓸모가 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함부로 다뤄져 이삿짐에 눌려버린 그린티가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천을 떠나 몇 년 가까운 이웃을 만들지 않았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으나 나는 또 이사를 할 것이고 떠나야 할 사람이니까. 일상에서 가족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은 친구와 나눌 수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의무감을 덜고 공통의 관심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그린티가 다시 생명을 가다듬은 지금 집으로 이사한 후 나도 친구를 만들었다. 또 헤어져 별것 아닌 사이가 돼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책에서 본 글귀는 내게 용기를 줬다. 정확한 구절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사귀다 멀어지는 사람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그저 작은 빅뱅에 의해 우리의 궤도가 달라져 멀어진 것뿐이다. 이 세상의 우연은 또 다른 빅뱅을 만들고 다시 궤도가 가까워지면 기뻐하며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만난 지 3년 된 친구와는 보다 깊어지는 중이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간다. 물론 아직도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많아서 밥 먹을 시간이 없지만 말이다. 같이 있을 때 화장실을 다녀오다 빨리 만나고 싶어 뛰어가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어려움을 이기고 꽃을 피워준 그린티처럼 내 친구관계에도 꽃이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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