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그날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나는 38주 만삭 산모였고 30분 거리에 사는 여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9시쯤 남편이랑 셋이 늦은 저녁으로 피자알볼로 '웃음꽃피자'를 시켜 먹었다. 수다 떨며 제한 없는 저녁을 보내고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동생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편과 나도 몸을 눕혔다.
얼마나 잤을까? 배탈이 났는지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구르다시피 바닥에 임신으로 부은 발을 내려놓고 뒤뚱거리며 화장실에 갔다. 시간을 확인했더니 새벽 1시였다. 이내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장염 초기증상 같은 아랫배가 쑤시는 통증이 생겼고 이렇게 2번 더 화장실에 다녀왔다.
만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체크해 보게 되었다. 시간이 일정하지도 않고 간격도 30분 정도에 많이 아프지도 않았으니 산통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화장실을 들락거려도 해결이 되지 않으니 장염증상도 아니었다. 비록 직업이 의사이고 산부인과 교과서가 집에 있지만 임신은 처음인지라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산모들에게 출산신호가 찾아왔다. 그 의견들을 종합해 보자면 몇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1. 10분 간격의 주기적인 산통이 있어도 초산이면 한참 걸릴 수 있어서 병원을 가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
2. 출산 후 한참 동안 제대로 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병원을 가기 전에 반드시 샤워를 하고 가야 한다.
우선 산통인지 모를 복통이 규칙적이지도 않았고, 초산이었고 다른 어떠한 징후도 없어 참아보기로 했다. 새벽 2시쯤 되니 평소와 다른 처음 겪는 통증에 남편을 깨워봤다.
"나, 산통이 있는 거 같아. 근데 불규칙적이고 그리 아픈 건 아니고... 아침에 병원 가도 되겠지?"
임신한 아내가 처음인 의사남편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질지라도 당장 병원에 가보자고 했고, 나는 인터넷의 카더라 통신의 조언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럼 잠시만, 나 샤워하고 가야 해."
"@.@......"
샤워를 시작하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복통이 왔다. 그런데 서있을 수가 없어 바닥을 손으로 짚고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통증으로 중간에 멈췄다 씻다를 반복해 샤워하는데 20분이 넘게 걸렸다. 다행히 병원은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야간 분만실에 도착하고 간호사가 진통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초산인지를 물었다.
"초산이시고 진통한 지 얼마 안돼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어요."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의 통증으로 애기가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안쪽 침대로 배정받아 기다리게 되었다. 병원의 시스템을 또 좀 아는지라... 급하지 않은 환자일수록 병원 관계자들의 동선이 긴 안쪽으로 배치된다. 아직은 아닐 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선배 산모들의 조언을 듣기 위해 휴대전화 검색을 했다. 내진을 하고 나서 무통분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된다는 글을 봤다.
간호사 선생님의 내진이 있었다.
"환자 분만실로 옮겨"
"!?!?!?"
병원에 도착한 지 2시간, 소정이는 내 가슴 위에 올려졌다. 참, 이론과 수많은 경험들과 실제는 다르다. 병원에 도착할 때부터 이미 아이머리가 내려오고 있었고 무통분만이고 뭐고 당장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단다. 너무 빠른 전개에 낳을 때 아팠는지 어땠는지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서른 살의 나는 나를 잘 몰랐다. 사실 마흔이 넘은 나도 나를 잘 모르긴 마찬가지다. 지금은 남편이 피부과를 하는데도 아파서 병원에 안 가는데 소정이를 낳던 그때는 출산과정 전체가 생각보다 안 아팠다. 낳자마자 생각했다.' 할만한데?'
당시의 상황은 심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귀하게 느껴진다. 웃음꽃피자에서 시작해 세상에 나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은 소정이가 삶을 향한 본능으로 젖을 빨던 그 감촉까지. 죽기 직전이 되면 인생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만약 그 순간이 오면 분명 차지할 한 장면이었다.
지금도 인생의 한 장면을 만들어가고 있다. 내게 주어진 하나의 사건을 한편씩 다큐로 찍으며 살아간다. 비록 관찰자에게는 시트콤일지라도... 철학자 들뢰즈의 한마디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