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세상을 연결하고 그로 인해 성장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다. 이사로 인한 불편한 경험은 인간관계에서도 있었다. 결혼을 학생시절에 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정해진 게 없었다. 남편은 아이가 3살일 때 공보의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어디로 떨어질지 모를 순간이었다. 피부과라서 소록도까지는 생각해 봤었는데 울릉도로 가게 될지는 몰랐다. 막 적응이 되려던 바로 1년 뒤에 다시 이천이라는 그야말로 연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 장소로 이사했다.
결혼 후 시작된 이사는 안 그래도 소심하고 좁은 인간관계를 더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1~2년 후면 헤어질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새로운 만남에 마음을 열기도 힘들었고, 그랬다가 헤어지고 상처받기 싫은 마음 때문에 사귀지 않았다고 해야 더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던 중에도 가깝게 지냈던, 나는 친구라고 믿은 이웃사촌이 있었다. 소탈하고 적극적이고 유머감각 있는 그녀를 나는 좋아했고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생전처음 남편과 아이를 집에 두고 아파트 상가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현재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지금 직장을 다니지만 회식도 참여하지 않으니, 전업주부로 생활하던 그 시절의 나로서는 파격적인 일탈이었다.
우리의 추억은 전국구로 쌓였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켜 놓고 이천에서 서울까지 나들이를 나오기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마음 가는 어느 곳이든 함께 놀러 다녔다. 그녀 덕분에 골프에 입문해 보기도 하고 이천 유지 사모님들의 모임에 따라간 적도 있었다. 무겁고 심각한 나와 다른 유쾌하고 명랑한 그녀와 함께한 생활이 행복했다.
시간은 흘러 남편의 공보의가 끝나갔다. 그녀는 우리가 이천에 남길 바랬다. 그녀의 바람이라서가 아니라 미래가 걸린 일이라 이천이나 용인에 남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고, 결국 우리는 서울로 왔다. 우리의 결정이 있은 후 그녀는 근처 신축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집들이가 있었다. 함께 어울리던 모두가 5만 원씩 모아서 선물을 샀다. 그리고 집들이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는 내게 5만 원짜리 상품권을 내밀었다. 명목은 이후 서울로 이사할 내 집의 집들이 선물을 미리 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와의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5개월을 더 근처에서 살았지만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내 쓸모가 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함부로 다뤄져 이삿짐에 눌려버린 그린티가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천을 떠나 몇 년 가까운 이웃을 만들지 않았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으나 나는 또 이사를 할 것이고 떠나야 할 사람이니까. 일상에서 가족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은 친구와 나눌 수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의무감을 덜고 공통의 관심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그린티가 다시 생명을 가다듬은 지금 집으로 이사한 후 나도 친구를 만들었다. 또 헤어져 별것 아닌 사이가 돼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책에서 본 글귀는 내게 용기를 줬다. 정확한 구절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사귀다 멀어지는 사람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그저 작은 빅뱅에 의해 우리의 궤도가 달라져 멀어진 것뿐이다. 이 세상의 우연은 또 다른 빅뱅을 만들고 다시 궤도가 가까워지면 기뻐하며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만난 지 3년 된 친구와는 보다 깊어지는 중이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간다. 물론 아직도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많아서 밥 먹을 시간이 없지만 말이다. 같이 있을 때 화장실을 다녀오다 빨리 만나고 싶어 뛰어가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어려움을 이기고 꽃을 피워준 그린티처럼 내 친구관계에도 꽃이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