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J Sep 12. 2024

어제는 피해자, 오늘은 가해자

시댁이 이사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추석명절이었다. 양가에 아이라고는 우리 딸뿐이라 시댁에 도착했을 때 간소하게 우리 가족들끼리 보낼 명절준비를 다해두시고 부모님은 손녀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릴 적부터 조용하게 놀던 아이라 시댁에 가도 가족끼리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당시 딸은 7살이었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 말을 들으신 어머님은 하얀 레이스 덮개로 자리차지만 하고 있던 전자피아노를 열어주셨다. 


10분쯤 쳤을까? 초인종이 울렸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어요. 정말 스트레스받아 죽을 것 같아요."


아래층에서 올라온 젊은 여성은 한 번도 본적 없는 내게 소리를 질렀다. 아침부터 계속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고 참다가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우선 미안하다고 말하고 명절이라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우리가 온 지는 2시간밖에 안 됐다고, 조심하겠다고 말하고 상황을 일단락했다. 비 오는 날 구정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중문을 닫으며 다시 시댁을 둘러봤다. 바닥에는 조각조각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나이 든 반려견의 다리 때문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는 사실 아랫집에서 거의 매일 시끄럽다고 올라와서 깔게 된 것이라고 했다. 조리공간과 식탁에는 두툼한 실리콘매트가 깔려 있었다. 이것도 출근하는 아가씨와 부모님이 이른 아침을 먹는데 아랫집에서 그릇소리로 시끄럽다고 하여 깔고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침을 왜 그렇게 빨리 먹냐며 식사시간을 옮기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노부부와 마흔이 다된 성인자녀가 살고, 낮에는 사람도 없는 집에 대한 층간소음의 호소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소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객관적인 수준에서의 소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럽게 느꼈다면 그건 소음이 틀림없다. 그 고통도 고통이 맞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공동주택에서 어쩔 수 없는 생활소음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집이 오래돼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인정하고, 함께 고칠 수 있는 부분 고쳐나가며 서로 이해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내가 중학생일 때 우리 윗집에는 피아노 전공을 위해 매일 피아노 연습했던 아이가 살았다. 주말에 겨우 쉴 시간이 있던 아버지는 주말이면 피아노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간혹 티브이에서 봤던 것처럼 밀대로 천장도 여러 번 두드렸다. 아파트라는 구조가 단지 한 층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윗집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에 우리보다 더 고통받는 이는 아래층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우리 집에서 듣던 소리보다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 집 아이는 노이로제로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였다. 이 문제는 윗집에서 자녀의 입시를 위해 개인주택으로 이사를 가면서 해결되었다. 


소음을 일으키는 세대와 소음으로 고통받는 세대는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을 선택하면서 일정 부분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어느 정도 공동생활에 대한 배려와 함께 살기 위한 규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수준에 있어서 개인차가 생긴다. 누군가는 공동생활을 위해 서로 조심하는데 더 큰 가치를 둘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하루 중 유일하게 개인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장소로서 집에 더 큰 가치를 두기도 한다. 물론 집은 둘을 모두 가진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진짜 잘못을 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특별한 의도 없이 우리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공동생활 주택에 살게 되는 이상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게 서로를 적대시하는 태도다. 층간소음 문제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삶의 공간인 집에서 서로를 미워하며 얼마나 각자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지 예상이 간다. 단절은 분노를 극대화시킨다. 이해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그들의 고통까지 묻어버린다. 적대감이 커질 뿐이다. 


화나서 찾아온 문 앞의 이웃에게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의미로 사과한다고 굴복하거나 잘못을 인정하는 게 되는 건 아니다. 천장에서 나는 소음에 당장 올라가 화를 내기보다 이해의 폭을 조금만 더 넓혀보는 건 어떨까? 몇 년 만에 손자, 손녀가 놀러 온 집일 수도 있고, 며칠만 집수리를 하느라 그럴 수도 있다. 대신 오늘부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일상의 말을 한마디 더 해보는 건 어떨까? 친해지면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된다. 부드럽게 말하기도 좋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할게 아니라 이게 다 내 행복을 위한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