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마장동 우시장, 거인의 승부수
글자가 생겨났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던 공책 위에. 내가 오른손으로 비뚤비뚤 눌러쓴 주소 옆에. 누군가의 글씨가 번져 있었다.
— 응, 나 여기 있어. 너는 누구니? —
나는 공책을 던지듯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누나는 자기 영역 저편에서 잠들어 있었고, 형의 골방에서는 가는 숨소리만 들렸다. 창밖은 어두웠다.
귀신인가. 나는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검토했다. 1988년의 제기동은 낡은 기와집과 좁은 골목이 뒤엉킨 동네였고, 어머니는 가끔 이 집에 뭔가 기운이 세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귀신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귀신은 소리를 내거나 물건을 움직이는 것이지, 이렇게 단정하고 유려한 글씨로 안부를 묻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공책을 바라보았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공포와, 그보다 조금 더 강한 무언가. 이름을 붙이자면 호기심이었다. 제기동으로 이사 온 뒤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누나는 선을 그었고, 형은 골방에 숨었고, 골목의 아이들은 나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낯선 글씨는,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아직 따뜻했다. 아니,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 같았다. 맥박처럼 뛰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공책 앞에 다시 앉았다. 연필을 집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밤에,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왼손으로 연필을 쥐었다.
오른손으로 쓸 때와는 달랐다. 아버지의 "오른손"이라는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님의 빨간 줄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목에 어색한 긴장이 맺히지 않았다. 연필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날개를 단 것처럼. 이 손이 원래 이런 손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온 이 손이, 사실은 가장 자유로운 손이었구나.
천천히, 한 글자씩 썼다.
— 나는 조운이야. 1988년 제기동에 살아. 너는 누구야? 어떻게 내 공책에 글을 쓴 거야? —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아버지가 나를 깨웠다.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한 일요일 아침 7시였다. 아버지는 내게 두꺼운 겉옷을 챙겨 입히며 말씀하셨다.
"조운아, 오늘 아버지 따라가자."
마장동이었다.
마장동 우시장의 아침은 이미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새벽 도축을 마친 고기들이 진열대에 오르는 7시에서 8시 사이, 시장은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인들의 고함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칼을 가는 소리가 금속성으로 울렸다. 흥정하는 목소리, 무거운 수레를 미는 소리, 갓 썰어낸 고기를 신문지에 싸는 바스락 거림. 이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좁은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냄새는 더 강렬했다. 비릿한 핏기와 짐승의 온기가 뒤섞인 그 냄새는 코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스며드는 종류였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냄새를 입고 있었다. 핏기 어린 앞치마, 기름진 손, 거칠게 트인 손등. 이 시장의 새벽을 수백 번 버텨온 사람들의 냄새였다.
나는 아버지의 작업복 자락을 꼭 쥐었다. 왼손으로.
아버지 조정민은 이 모든 것 한가운데 서 있었다.
평소 집에서의 아버지는 말이 없고 시선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장동에서의 아버지는 달랐다. 서툰 발골 솜씨를 기술로 메우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로 움직였다. 옆 가게 상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아버지는 고기 비계를 떼어내며 거래처를 뚫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정민이 형, 오늘 들어온 암소 어때요?"
"괜찮아. 마블링 좋더라. 따로 빼놔."
짧고 단호한 대답. 눈빛이 날카롭고 살아있었다. 집에서의 그 무거운 침묵이 아니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진짜 얼굴이었다. 집에서의 침묵은 피로였고, 여기서의 날카로움은 의지였다.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며 이 뜨거운 시장을 눈에 새겼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전쟁터였다. 아버지는 매일 이 비릿한 냄새 속에서 우리의 내일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백화점의 식품관 납품 건이었다.
"윤희야, 이제 우리도 숨통 좀 트이려나 보다. 이번 납품만 제대로 성사되면 애들 공부시키고, 너 식당 일 안 나가게 해 줄게."
어느 날 저녁, 마장동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의 무게 대신 묘한 설렘이 묻어났다. 백화점 담당자가 아버지의 성실함을 높이 샀다며 손을 맞잡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신뢰라는 이름의 성경 구절처럼 믿었다.
나는 그날 밤 밥상 위에 오른 고기반찬을 바라보며 이상한 불안을 느꼈다. 어른들의 희망은 왜 늘 숫자로 쓰여 있을까. 그 숫자들이 클수록, 나는 더 무서웠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가에 오랜만의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늦게, 낯선 남자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는 이불속에서 반쯤 잠든 상태였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 낯선 목소리, 아버지의 낮고 긴장된 응답 소리. 나는 눈을 감은 채 귀를 세웠다.
문틈으로 살짝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장동 사람들은 냄새를 입고 다녔다. 핏기, 기름기, 이른 아침 시장 공기의 냉기. 그 냄새들이 옷에 배고, 손에 배고, 얼굴에 배어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증거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한겨울 제기동 골목에 양복을 입고 나타난 그 남자의 옷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너무 깨끗했다. 마장동의 아침을 단 하루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깨끗함이었다. 손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칼을 잡아본 적 없는 손. 한 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 없는 손. 그의 구두는 제기동 골목의 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마장동 사람이 아니다.
아이의 직감이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조 사장님, 내일 계약 전에 확인할 게 있어서요. 물량을 좀 더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선불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이어졌다.
"얼마 나요?"
숫자가 오갔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도라지 껍질을 까다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칼이 도마 위에 놓이는 소리.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낯선 남자가 떠난 뒤, 아버지는 한동안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창문 틈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장동에서 보았던 그 날카롭고 살아있던 눈빛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거인도 혼자일 때는 작아진다. 아버지의 어깨가, 오늘 아침 시장에서보다 훨씬 좁아 보였다.
방으로 돌아와 공책을 펼쳤다.
내가 왼손으로 쓴 글자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글자들이 번져 있었다.
— 조운아. 나는 하온이야. 너의 아들이야. 2025년에 살고 있어. 아빠, 지금 집에 낯선 사람이 왔지? 그 사람 믿으면 안 돼. —
나는 공책을 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들. 내 아들. 아직 결혼은커녕 여자애 손도 잡아본 적 없는 내게, 서른일곱 번의 계절 너머에서 아들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닿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왼손을 타고 흐르는 이 뜨거운 온기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귀신이라면 이렇게 따뜻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도.
손이 떨렸다. 공책이 흔들렸다. 나는 왼손으로 연필을 꽉 쥐었다.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온 그 손으로, 내 미래일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천천히 썼다.
— 하온아. 너는 진짜 내 아들이니? 나보다 형 같은데 어떻게 내 아들이야? 그리고 그 사람이 왜 위험한 거야? 아직 늦지 않았어? —
글씨를 다 쓰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공책을 바라보았다.
답장을 기다리며, 마당 쪽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들으며. 그 한숨이 삼키고 있는 것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 희망인지, 아니면 거대한 낭떠러지인지를 나는 확인해야만 했다.
왼손 끝이 뜨거웠다. 미래가 이 손을 통해 나에게 닿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