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낡은 공책
어떤 기억은 흉터가 되고, 어떤 흉터는 누군가의 지도가 된다.
1988년 제기동의 낡은 방에서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며 야구공을 던지던 소년 조운의 불안은, 서른일곱 번의 계절을 건너 2025년 아들 하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울타리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상처는 때로 그렇게 쓰인다. 누군가를 지키는 뿌리가 되기 위해, 먼저 뽑혀본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
따뜻한 물이 자동으로 나오는 비데 위에 앉아, 중앙난방이 은은하게 데워주는 타일 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어렸을 때 한겨울 밤에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을 다녔다고 했다. 차가운 슬리퍼, 칠흑 같은 어둠, 암모니아 냄새.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상상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겪어보지 않은 추위, 살아보지 않은 가난, 버텨보지 않은 밤. 그것들은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모르는 것들이다. 아빠의 어린 시절이 내게는 그런 것이었다.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그러나 어쩐지 내 몸속 어딘가에 새겨진 것처럼.
나는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이 온기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차가운 마당을 수천 번 건너고 나서야, 이 따뜻함이 여기 있게 되었다는 것을.
중곡동의 저녁은 평화로웠다.
식탁 위에는 갓 지은 밥의 단내와 엄마 유진의 정갈한 반찬들이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1988년 조운의 저녁상이 부모님의 부재와 침묵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다면, 2025년 하온의 저녁상은 아이의 재잘거림으로 완성되는 축제였다. 같은 저녁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두 식탁은 서로 다른 계절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지우가요, 자기가 로봇 박사라면서 드론을 분해했는데 나사가 세 개나 남았다니까요? 선생님한테 딱 걸려서…!"
하온의 익살스러운 손짓에 조운과 유진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의 목소리가 거실의 공기를 밀어 올릴 때마다 조운은 비로소 자신이 안착했음을 느꼈다. 이 웃음을 지키기 위해 일한다고,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유진이 사과를 깎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김포 물류센터 팀장 자리 말이에요. 이 부장님이 당신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대요. 연봉도 오르고 직급도 차장으로 점프할 기회라는데, 회사에서 아파트까지 지원해 준대요. 하온이 중학교 가기 전에 자리 잡으면 좋지 않을까요?"
이사.
그 단어가 하온의 귓가에 날카로운 파편처럼 박혔다. 소파에서 레고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하온의 손이 멈췄다. 지금 다니는 중광초등학교, 매일 아침 안기는 수영장의 푸른 물, 세상에서 제일 친한 지우가 있는 키움센터. 하온의 세계는 중곡동이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하온은 숨을 죽이고 아빠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조운은 잠시 창밖 가로등 불빛을 응시했다.
제기동의 그 어두웠던 마당. 공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끌고 나섰던 슬리퍼의 냉기가 발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밤마다 혼자 그 어둠을 지나야 했던 소년. 이 집의 불빛이 얼마나 귀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안 가."
유진은 남편의 완고함이 의아했다. 조운은 하온 쪽을 슬쩍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에게는 돈이나 명예보다 지켜내야 할 더 절실한 가치가 있었다.
그날 밤, 조운은 잠든 줄 알았던 하온의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조운의 텅 비고 서늘했던 제기동 방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하온이 직접 그린 로봇 도면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고, 책장에는 아이의 성장이 묻은 책들이 빼곡했다. 조운은 그 방에 서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열한 살에 갖지 못했던 것들이 거기 있었다.
조운은 하온의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하온아, 아빠는 어렸을 때 이사를 너무 많이 다녔어. 할아버지 사업 때문에 철산동에서 부천으로, 다시 제기동으로…. 겨우 골목길이 익숙해질 만하면 어김없이 낯선 곳으로 떠나야 했지. 늘 전학생이었고, 늘 혼자였어. 친구를 사귀어도 금방 헤어질 거란 걸 알기에 마음을 다 주지도 못했지."
조운의 눈빛에는 마흔일곱 살 어른의 지혜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열한 살 소년의 시린 외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 하온이가 아빠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 곳에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자랐으면 해. 언제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오랜 친구들과,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익숙한 골목길. 아빠가 너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아파트 평수가 아니라, 바로 그 정주의 안정감이야."
말을 마친 조운의 손이 아들의 이불 위에 가만히 놓였다. 왼손이었다. 밥상 아래에서 떨던 그 왼손이, 이제는 아들을 다독이는 손이 되어 있었다.
하온은 조용히 일어나 아빠의 목을 꼭 껴안았다. 아빠의 넓은 등에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단단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빠가 방을 나가고, 하온은 한동안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레고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다시 저릿해 왔다. 아까부터였다. 저녁 식탁에서 이사 이야기가 나오던 그 순간부터. 왼손이 따뜻했다. 살짝 뜨거울 정도로.
하온은 손바닥을 펼쳐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온기는 남아 있었다.
아빠, 거기 있어요?
혼잣말이었다. 입 밖으로 나온 것인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온은 스스로도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몰랐다. 다만 왼손이 따뜻할 때마다, 어딘가 먼 곳에 닿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만나지 않은 누군가와,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하온은 그 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으려 했다.
그때, 기억이 났다.
창고.
아빠가 절대 열지 말라고 했던 그 창고. 이사 오기 전부터 있었다는, 낡은 자물쇠가 달린 그 문. 하온은 한 번도 그 안이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척했는지도 모른다.
왼손이 다시 뜨거워졌다.
하온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섰다. 복도를 지나 창고 앞에 섰다. 자물쇠는 잠겨 있었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는 순간, 자물쇠가 소리 없이 열렸다. 왼손이 닿자마자.
창고 안은 먼지와 시간의 냄새로 가득했다. 낡은 박스들, 아빠의 오래된 사진들, 구겨진 서류들. 그리고 구석에,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야구공 하나와, 그 옆에 낡은 공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하온은 공책을 들었다. 표지가 삭아 있었다. 펼쳤다.
첫 장에 오른손으로 쓴 듯 비뚤비뚤한 글씨가 있었다.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하온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것은 아빠의 것이었다. 열한 살 아빠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뚤어진 글씨 옆에, 분명히 방금 전까지 없었던 글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또렷하고 유려한 왼손의 글씨로.
한 글자씩. 천천히.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쓰고 있는 것처럼.
— 응, 나 여기 있어. 너는 누구니? —
하온의 손이 떨렸다. 공책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도 몰랐다.
이건 꿈이야. 꿈이어야 해.
하지만 손바닥은 뜨거웠다. 공책은 실재했다. 그리고 글자는, 지금도 계속 번지고 있었다